89회 아카데미 어워드는 문라이트의 작품상 수상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상을 아쉽게 놓친 영화들도 저마다의 매력을 가지고 빛을 내고 있다. 라라랜드를 비롯해 작품상 후보에 오른 9개 모든 영화들의 작품성은 그 어느 해에 비해도 뒤지지 않는다.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들의 리뷰를 통해서 2016년의 영화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본다.


 

두 개의 신념

핵소 고지의 주인공인 데스몬드 도스는 종교적 신념과 어렸을 때의 강렬한 체험 때문에 절대 총을 잡지 않기로 결심한다. 살인기술을 배우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모든 문제는 그가 나라를 위해서 군대에 가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주변의 만류에도 그는 군대에 입대한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애국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군대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시련이다. 총을 들지 않는 도스는 동료 사이에서 박해를 받는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전쟁에서 싸우지 않는 동료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창에도 들어가고 휴가도 나가지 못하는 등 고난을 겪는다. 그냥 포기한다 해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상황이다. 하지만 도스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핵소 고지가 여타 다른 전쟁영화들과 다른 지점은 이 부분이다. 흔히 우리가 대척되는 지점에 있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의 신념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1명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1000명을 죽이면 영웅이라는 말이 있다.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에서의 살인은 불가피한 것이며 오히려 자신의 나라와 가족을 위해 살인하는 것은 권장되는 현실이 담겨 있는 말이다.

도스는 살인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고 싶다는 생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전쟁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 고뇌하는 병사의 이야기는 전쟁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소재다. 하지만 자신이 싸우는 전쟁이 완벽하게 옳은 것이라는 확신이 있음에도 사람은 죽이지 않겠다는 도스는 특별해 보인다.

 

양심과 애국심

핵소 고지는 양심과 애국심이 충돌할 때 어떻게 하면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다. 도스는 끝까지 총을 잡지 않고도 부상당한 전우들을 75명이나 구해내면서 결국 의회 명예 훈장을 받았다. 전쟁터에서의 혁혁한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 총을 들지 않은 군인 최초로 받은 훈장이었다.

영화와 영화의 바탕이 된 실화에서는 ‘다양성의 존중’이 느껴진다. 미국과 한국과 비교를 해보면 이런 점이 도드라진다. 한국은 여전히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나 종교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내고 있다. 대체복무제를 통해서 나라를 위해 일할 기회를 줄 수도 있지만 이런 제도의 본격적인 도입은 요원해 보인다.

미국은 세계 2차 대전이라는 극한상황에서도 한 사람의 양심과 신념을 인정하고 총을 쓰지 않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세운 공적을 인정하고 국가에서 훈장을 수여했다. 전쟁터에 나가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뿐만이 유일한 애국의 길이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미국사회가 다양성을 얼마나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멜 깁슨과 아카데미의 화해

주연인 앤드류 가필드가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온전히 감독 멜 깁슨의 것이다. 감독 멜 깁슨의 기술적 능력은 이미 검증됐다. 그는 장기인 전쟁영화 연출로 오랜만에 다시 돌아왔다. 멜 깁슨이 14년 동안 간직하고 있던 이 프로젝트로 아카데미 더 나아가서는 할리우드와 화해했다.

멜 깁슨은 브레이브 하트 등으로 아카데미와 인연이 깊은 감독이지만 동시에 할리우드에서 보기 드문 공화당 지지자여서 오랫동안 ‘왕따’였다. 게다가 그가 마지막으로 영화를 연출했던 2006년 음주운전으로 체포된 뒤 “유대인들은 세계의 모든 전쟁에 책임이 있다”라는 말을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유대계들이 많이 진출해있는 영화계에서 유대인을 비하하는 발언은 치명타였다.

할리우드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그는 ‘다양성의 존중’과 ‘국가적 의무의 이행’이라는 상반된 가치가 조화되는 작품을 통해서 할리우드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시도는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는 10년 만에 아카데미의 레드 카펫을 밟았다. 사회자인 지미 키멜이 짗궂은 농담을 해도 웃고 있었다. 위대한 배우이자 감독인 멜 깁슨이 할리우드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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