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박물관(Harry S. Truman Library & Museum)

몇년간 남침 준비를 하고 있던 김일성이 1950년 4월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으로 부터 남침 승인을 얻어냈다.
스탈린은 소련의 핵실험(49년 8월 29일) 성공으로 자신감이 생겼고 애치슨 라인의 공표로 미국의 전쟁개입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남침을 승인했다.
김일성은 중국에서 장개석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공산정부를 세운 모택동에게도 동의를 얻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재래식 군비를 줄여 경제와 복지로 전환하고자 했던 트루먼 행정부는 재래식 군사력을 급속히 줄이고대신 핵무기를 이용해 소련의 위협에 대처했다.

인디펜던스 시 트루만의 고향에 있는 트루먼 라이브러리 뮤지엄(Harry S. Truman Presidential Library & Museum)에는 대통령 재임기간의 이뤄졌던 한국전 참전, 마셜 플랜 , NATO 창설,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맞선 공수작전등의 업적들이 기록 보존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1,200만명에 달했던 병력수는 1947년에 150만명으로 줄었고, 국방예산 역시 909억 달러에서 103억 달러가 되었다.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했지만 핵무기 우위에 있는 미국을 상대로 3차 대전을 일으키지 않을거라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위성국가인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간과 하고 있었다.
1949년 5월 28일 군사고문단 500명을 남기고 45,000명의 미군이 한국에서 완전 철수 했다.

미조리주 잭슨 인디펜던스(Missouri Jackson County Independence)시는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의 고향이다. 이곳을 기반으로 비즈니스도 했으며 정계에 들어서고 판사로 재직했다. 이곳에는 33대 대통령 트루먼의 생가와 라이브러리 뮤지엄이 있으며 인디펜던스(Independence) 다운타운은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1950년 1월 12일에 발표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을 의미하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에는 한국이 빠져 있었다.
1950년 6월 비극적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발발을 감지 못한 한국은 정정이 불안한 무방비 상태였다.

2차세계대전을 끝낸 트루먼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위해 군비를 대규모 감축했다. 냉전시대의 여명기인 이시기 미국은 세계제일의 부를 영위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24일 토요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Missouri Independence)에 있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다는 주한 미대사 존 무초(John Joseph Muccio)의 보고를 받은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국무장관이 대통령에게 긴급 전화를 했다.

1952년의 미국과 세계. 한국전 관련 기사도 여럿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파병을 반대하는 참모들의 의견을 뿌리치고 파병 결정을 내렸다.
‘트루먼은 미국의 참전을 결정하는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하고 있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을 예측하지 못했다.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한 이후에는 한반도에 중국 국민당의 병력을 투입하고 미군이 중국 본토를 폭격하는 전략을 취했다.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즉각 해임했다.
미국은 연 150만 명의 병력을 한국으로 보내 54,246명이 전사하고 103,284명이 부상당하고 8,177명이 실종됐다.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은 의회가 선전포고를 결의했지만 한국 전쟁은 트루먼 대통령의 해외파병권에 의해 참전이 결정되었다.
1950년 6월30일 미국 국방부는 한국전선을 시찰한 맥아더 장군의 보고를 받았다.
맥아더는 파죽지세의 북한군을 저지하려면 해공군뿐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트루먼은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했다.
맥아더는 주일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제24사단 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해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2차세계대전을 끝낸 트루먼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위해 군비를 대규모 감축했다. 냉전시대의 여명기인 이시기 미국은 세계제일의 부를 영위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방치 했더라면 한반도는 쉽게 공산화가 되었을 것이다.
트루먼은 한국전 참전 결정이 일본에 원자폭탄 투하 결정보다도 더 어려웠다고 회고하며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로 부터 지지를 받는 한국을 침략한다면 주변국가들도 공산국가의 공세를 견디지 못할 것이고 북한의 공격을 방치한다면 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위해 군비를 대규모 감축했고 이 시기 미국은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트루먼 시기 미국생활을 상징하는 전시물.

워싱턴 DC 한국전쟁 기념관(Korean War Veterans Memorial) 입구에 음각되어진 말처럼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라와 그들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미국은 연 150만 명의 병력을 한국으로 보내 54,246명이 전사하고 103,284명이 부상당하고 8,177명이 실종되는 대가를 치르고 한국을 지켜냈다.
트루먼의 한국전 참전 결정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속하고 번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트루먼 대통령 재임당시 기사를 모은 전시물. 한국전 관련 기사도 여럿 있다

한국전 참전, 마셜 플랜 , NATO 창설,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맞선 공수작전등 트루먼 대통령이 내린 중요한 결정들이 냉전을 종식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런 업적으로 2017년 CBS방송이 91명의 역사학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위대한 역대 대통령 순위에 6위로 선정되는등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높다.
하지만 트루만 대통령은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핵공격 명령을 내려 일본을 항복시켰지만 20만명이 죽거나, 방사능에 피폭되어 전 세계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리틀 보이(Little Boy)라는 별명의 작은 거인 33대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은인이다.

Harry S. Truman Library & Museum
500 W US Hwy 24
Independence, MO 64050
웹사이트 https://www.trumanlibrary.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