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과 폭력이 심각한 중미 지역 온두라스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를 떠나 미국 국경으로 향하는 이민자 행렬을 ‘캐러밴’이라고 부른다. 올해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중미 이민자들이 범죄 예방과 정치적인 관심을 끌고자 집단으로 미국 국경으로 향하고 있다.

연례행사가 된 ‘캐러밴’은 매년 부활절을 전후해 대규모로 이동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정책은 합법적인 이민자 외에는 누구도 미국에 들어올 수 없다는 무관용 원칙이다. 국토안보부에 이들이 국경을 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국경에 주 방위군을 동원해 배치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엔젤 아일랜드는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가장 큰 섬이다.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있으며 티브론에서 남쪽으로 1마일 떨어져 있다.

이민자가 만든 나라 미국은 독립 후 첫 100년 동안 유럽인 이민을 아무런 규제 없이 받아들이는 무제한 개방정책을 펼쳤다. 이민자들이 점점 증가하자 다양한 이유로 이민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1875년 범죄자와 매춘부들의 이민을 제한하는 규정이 시행되었다. 1882년에는 이민법을 만들어 범죄자와 정신질환자, 생활보호 대상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민을 제한함과 동시에 중국인배제법을 만들어 중국인 이민을 막았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이민을 규제한 법이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입국이 금지됐고 미국 시민권 취득도 제한됐다. 특정 국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민을 금지한 이 법은 1943년 폐지될 때까지 미국 이민 역사의 최대 오점이 됐다.

1965년 이민법 개정 이후 의회는 출신국에 따라 이민자를 차별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미국 이민규제는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여건 등 시대적 배경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데 트럼프 정부의 반이민 정책은 60여 년 전 과거로 회귀하고 있어 우려된다.

이민국 수용소에 도착한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들은 심문조사를 위해 감옥 같은 목조막사에 갖혀있었다.

미국 이민 초기 유럽 이민자들은 대서양을 건너 뉴욕 허드슨강 하구에 있는 엘리스 섬 이민국을 거쳐 미국에 입국했다. 동양인은 서부의 엘리스 아일랜드라 불리는 엔젤 아일랜드 이민국을 통해 입국했다. 엔젤 아일랜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티브론에서 남쪽으로 1마일 떨어져 있는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가장 큰 섬이다.

1891년 엔젤 아일랜드에 미국 연방정부 검역소가 문을 열고 외국 선박을 검역했는데 1910년부터는 이민국 수용소가 들어서 1940년까지 태평양을 건너 입국하는 동양인을 심사했다.

뉴욕 엘리스 아일랜드에 도착한 유럽 이민자들은 대부분 도착한 날 미국에 입국했을 뿐만 아니라 3% 미만이 입국거부를 당했다. 하지만 엔젤 아일랜드에 도착한 중국인들은 평균 3주 반에서 22개월까지 이곳에 수용되어 심문을 받았고 18% 정도가 입국이 거부돼 돌아갔다.

엔젤 아일랜드 이민국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중국인 이민자들을 추방하는 것이었다. 멀고 험한 뱃길에 시달려 지치고 병든 몸으로 샌프란시스코 엔젤 아일랜드 이민국 수용소에 도착한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들은 심문조사를 위해 감옥 같은 목조막사에 수용되었다.

3층으로 된 침대가 빽빽이 들어찬 500스퀘어피트 정도의 공간에 약 400여 명이 수용되어 짧게는 수 주일 길게는 수 개월, 수 년에 걸친 억류생활을 했다. 엔젤 아일랜드 출입국 관리소에서 약 100만명의 이민자가 거쳐 갔는데 중국인 17만5000명과 11만7000명의 일본인이 이곳을 통해 미국에 정착했다. 이민국 박물관으로 꾸며져 일반에 공개하고 있는 이민 수용소를 둘러보며 이민자들이 겪었을 외로움, 좌절감, 두려움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1910년에 엔젤 아일랜드에 이민국 수용소가 들어서 1940년까지 태평양을 건너 입국하는 동양인을 심사했다.

엔젤 아일랜드로 입국한 중국계 이민자 후손으로 아시안 이민 역사를 연구하는 미네소타 대학의 에리카 리 교수와 캘리포니아 주립대 주디 융 교수의 저서 ‘엔젤 아일랜드’에는 1913년 7월 9일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한 조선인 청년 6명의 취조기록도 있다.

그들은 학생이라고 밝혔지만 학생임을 증명할 서류나 여권조차 없었다. 이들 6명 중 4명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돼 일제 경찰의 고문을 받다 가까스로 탈출한 독립운동가였다. 특별히 입국 허가를 고려해달라는 상하이 주재 미국영사의 추천서가 있었다. 대한인국민회의 후원으로 조선인 청년 난민 여섯 명은 한 달 만에 미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학생 최경식씨는 1925년 엔젤 아일랜드에 들어와 심사를 거쳐 입국 허가를 받았다. 당시 그는 조선기독대학(현 연세대)을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주에 있는 드포 대학 입학 허가를 받은 유학생이었다. 천사의 섬을 통해 많은 사람이 미국 땅을 밟고 정착했지만 이곳은 중국인과 동양인 이민을 규제하기 위한 곳이기도 했다.

수용소에는 이름 모를 한인의 용품이 전시돼 있고 수용소 외곽 이민 부조물에 이곳을 거쳐간 이민자 이름 중에 한인 이민자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현 트럼프 정부의 이민 정책은 특정국가나 민족의 이민을 규제하던 1800년대 이민 정책과 닮았다. 미국의 이민정책은 정치적 논리를 뛰어넘는 범인류적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940년 이민국이 폐지된 후 엔젤 아일랜드는 1958년에 주립공원으로 지정됐고 1964년에는 국립 역사 기념지, 캘리포니아 사적지로 지정됐다.

이민 수용소는 2009년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글, 사진 / 신현식

23년간 미주중앙일보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진부장과 사진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93년 도미 전까지 한국에서 광고사진 스튜디오 ‘옥슨’ 설립, 진도그룹 사진실장, 여성지 ‘행복이 가득한 집’과 ‘마리끌레르’ 의 사진 책임자로 일했으며 진도패션 광고 사진으로 중앙광고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 성소수자 사진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6년 6월 RV카로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으며 2년 10개월 동안 40여개 주를 방문했다. 여행기 ‘신현식 기자의 대륙탐방’을 미주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