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 중간에 고려인들이 깊이 뿌리를 내렸다. 실크장사를 위해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던 고려인들이 아니고, 러시아 시대 연해주 지방에서 강제 이주되어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고려인의 후예들이다.

1937년 10월 이틀만 가면 된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한 달 이상 가축용 화물기차에 실려 어딘지도 모른 채 내쳐진 곳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이었다. 러시아어로 한민족을 가리키는 표현은 ‘까레이쯔’ 또는 ‘코레이치Корейцы’, 요즈음은 ‘고려사람’에서 유래한 ‘코려사람 Корё-сара́м 또는Koryo-saram’ 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실크로드에 뿌리를 내린 김병화 선생과 고려인들

유태인이 나치 캠프로 보내지기 위해 화물 기차에 동물처럼 실려 가는 영화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나라 잃은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 이야기이다.  그 결과 스탈린 정권에 의해 고려인 17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고, 강제 이주 정착 과정에 4만여 명이 사망했다.

김병화 선생 흉상과 박물관 입구
김병화 선생에 관한 저서
김병화 선생에 관한 저서 2

고려인 2세 장 에밀리아 씨(78세)는 현재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김병화 마을의 김병화 박물관 관장이다. 1940년에 태어난 에밀리아 관장은 손수 박물관을 안내하며 자기의 경험과 함께 두 번이나 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 김병화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풀어 논다. 

고려인 2세 장 에밀리아 박물관장

김병화(1905-1974) 선생의 리더십 아래 천여 가족이 갈대밭만 무성한 황무지를 개간, 갈대집과 토굴에 기거하면서 누룽지로 연명하며 콜호즈 집단농장을 일으켜 세운 이야기이다. 초기의 볏씨 농사, 목화재배, 농장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농사, 교육,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집단농장을 만들었다. 이역 땅에 꿋꿋하고 자랑스러운 한인의 뿌리를 내린 분이다.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 박물관 안에 있는 김병화 선생의 대형 초상화 옆에 있는 문구이다.

장 에밀리아 씨는 카자흐스탄에서 사범대학을 졸업, 1991년 우즈베키스탄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던 때부터 청소년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다. 사별한 남편 장 라지온 선생은 모스크바에서 수학, 초기에 김병화 집단농장의 일을 도왔고, 에밀리아 관장은 김병화 선생의 사돈이 된다.

독립운동가 – 김규면, 장병태, 이홍파, 손두현(앞줄 왼쪽부터) 김병화, 김일수(뒷줄 좌측) (1920, 블라디보스토크)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

김병화 선생은 함경북도 경흥 태생, 항일의용부대에서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 일본군과의 항일투쟁에 기여하였다. 그는1940년부터 35년간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집단농장을 세우고, 학교·은행·도서관 등을 건립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영웅 (1948)’  ‘이중 노동영웅 (1951)’이라는 금별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다. 2005년 김병화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병화 박물관은 새롭게 단장되었고,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김병화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로 지정된 김병화 박물관

박물관에는 강제이주 초기 당시 한인들의 생활 모습과 농장의 역사에 대한 사진 설명이 있으며, 박물관 앞에는 김병화 동상이 서 있다. 초기의 고려인들은 정치적 탄압과 차별대우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거주지 이탈 자유가 없었다. 스탈린 시대의 비밀경찰의 엄중한 통제로 죄수 같은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농가 수가 거의 2천, 주민이 8천, 한국인은 20%
1974년 공식적으로 김병화 농장으로 명명 되었고, 현지 고등학교도 김병화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김병화 농장의 생산 활동
농업 생산
김병화와 함께하던 동료들
김병화 선생과 함께 구소련 정부로부터 메달을 받은 많은 고려인

고려인 4세 현지 가이드 율리아

에너지가 넘치는 현지 가이드 율리아는 30대의 고려인 4세로서 러시아어, 우즈베키스탄어, 16세 때부터 배운 한국어를 자유스럽게 구사하면서 실크로드,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역사를 꿰뚫어 설명한다. 율리아에 의하면 고려인이 강제 이주를 당한 주요한 이유는 당시 연해주 지방의 한국인들이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소련 당국이 위험을 느껴 소수민족 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한인들은 10집 중 6집이 차를 소유할 정도로 부유했으나, 결국 재산 몰수까지 당하였다. 고려인 4세 율리아에게서 황무지에서도 살아 남은 고려인의 인내, 노력, 프라이드, 뿌리를 전해 느낄 수 있었다.  

김병화 박물관 외벽의 모자이크

한때는 소련인, 두 개의 조국 ‘한국‘과 ‘조선’ 사이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껴 스스로를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우리는 같은 뿌리로 이해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야겠다. 2000년대부터는 고려인들의 한국 취업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에 이주한 고려인들은 안산시 땟골마을에 약 7천여 명, 광주광역시 고려인 마을에 약 4천여 명, 어려운 삶 가운데 한국 사회에 적응하며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외 동포 2, 3세까지만 한국 국적을 인정하기에, 4세 후손들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었는데, 최근에 재외동포법 시행령 개정안에 의해 4세대 이후도 직계비속 재외 동포의 자격을 얻게 되어 다행이다. 머나먼 유랑의 길을 끝내고 다시 고국에 돌아와 뿌리를 내리는 모습이다.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까지는 거의 9천 km
김병화 박물관은 타쉬켄트에서 40분 거리
타쉬켄트에 있는 이슬람 사원, 16C
최근 고려인의 분포는 러시아에 10만 여, 우즈베키스탄(1)에 17만 여, 카자흐스탄에 8만 여, 키르키즈스탄에 1만 5천, 우크라이나 1만 3천 여, 투르크메니스탄 3천 여, 타지키스탄 6천 여, 모두 5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글/사진 시내산 김정선 (세계인문기행가)

시내산 김정선 씨는 7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대학 교수로 10년, 90년대에 교육연구 회사를 세워 20년 이상 미정부 K-20 STEM 교육프로그램 연구 사업에 기여했다. 연구를 위해 미국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녔고, 은퇴 후에도 세계여행을 통해 새로운 인문학 공부를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