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1610년쯤부터 북미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출자한 주식회사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진출한 것이다.
종교 박해를 피해 지금의 뉴잉글랜드 지역에 정착한 집단도 있었다. 인디언들은 영국에서 건너온 백인 침입자들을 도와 담배농사법 등을 가르쳐줬다. 백인들은 인디언들과 조심스럽게 공존했다.

하지만 1630년 이후 영국제국의 본격적인 식민지 정책으로 이민이 늘어나고 백인들의 정착촌이 확대되면서 인디언 전쟁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뉴잉글랜드 지역에 살던 피쿼드족과 영국정착민들 사이에 1637년 일어난 피쿼드 전쟁으로 본격적인 인디언 말살정책이 시작되었다.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조지 워싱턴도 미국독립 이전 민병대를 이끌고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뿌리내리고 살던 인디언들을 말살했다.

1876년 수족, 샤이엔족, 아라파호족 등의 인디언들이 종교의식을 하고 있을 때 커스터 중령이 습격을 했다. 리틀 빅혼 전투 기념지에는 인디언의 아픈 역사가 스며있다.

미국 독립 이후 백인들은 급속하게 서쪽으로 진출했다. 테네시주 민병대 출신으로 독립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앤드루 잭슨은 1814년 앨라배마 호스슈 밴드 전투에서 크릭 인디언 800여 명을 학살했다. 이후 7대 대통령이 된 앤드루 잭슨은 “인디언은 백인과 공생할 수 없는 열등 민족”이라고 의회에서 연설하며 1830년 ‘인디언 추방법’을 제정하고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인디언들을 아칸소와 오클라호마 정착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 4만5000여 명의 인디언들이 ‘눈물의 길’을 따라 이주하면서 4000여 명이 숨졌다. 이 정책으로 미시시피 강 동쪽으로는 인디언이 사라졌다.

1861년 4월 12일부터 1865년 5월 9일까지 벌어진 남북전쟁기간에도 인디언 토벌은 계속되었다. 링컨 정부는 남북전쟁 기간에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땅을 인디언들로부터 강탈했다. 흑인노예를 해방한 인권 대통령으로 알려진 에이브러햄 링컨도 인디언에게는 무자비했다. 1862년 12월 26일 링컨은 미네소타 수족 인디언들의 봉기를 진압하고 체포한 인디언 38명에게 집단 처형을 지시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집단 교수형이었다.

빅혼 전투 기념지 마당에 전시된 인디언 피티. 미군 초소.

1865년 4월 남북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평원의 인디언 사냥이 시작됐다.

1867년 북군영웅이며 육군장관이었던 윌리엄 셔먼은 “올해 인디언을 많이 죽일수록 내년에 죽일 인디언이 그만큼 줄어든다. 이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거지 종자로 남겨두는 게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1876년 사우스다코타 인디언 성지 블랙 힐스 지역에 금이 발견되자 미군은 조약을 스스로 깨고 수족 소탕 작전에 나섰다.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은 육군 장관 셔먼의 인디언 소탕군에 편성되어 제 7기병대 연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전투 기념지에는 전사한 병사들의 위치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1876년 6월 25일 공을 세우기에 급급했던 커스터는 지금의 몬태나주 리틀 빅혼 카운티 리틀 빅혼 강변에서 야영하며 종교의식을 하고 있던 1500여 명의 인디언을 발견하고 이들을 기습했다.

커스터 중령이 지휘하는 제 7기병연대는 수적으로 또 전술적으로 우세했던 인디언들에게 섬멸됐다. 전사자 268명, 부상자 55명이었다. 미국인들은 커스터를 야만인을 퇴치하려다 산화한 영웅으로 미화하고 있다.

리틀 빅혼 전투를 재현해놓은 모습.

글, 사진 / 신현식

23년간 미주중앙일보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진부장과 사진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93년 도미 전까지 한국에서 광고사진 스튜디오 ‘옥슨’ 설립, 진도그룹 사진실장, 여성지 ‘행복이 가득한 집’과 ‘마리끌레르’ 의 사진 책임자로 일했으며 진도패션 광고 사진으로 중앙광고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 성소수자 사진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6년 6월 RV카로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으며 2년 10개월 동안 40여개 주를 방문했다. 여행기 ‘신현식 기자의 대륙탐방’을 미주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