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결정한 것은 꽤 오래 전이었다. 처음엔 오토바이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의 끝 칠레 우스아이야를 가기 위해 오토바이를 구입했다. 하지만 체 게바라처럼 20대 젊은 혈기도 아니고 현실적 문제와 집사람 만류로 오토바이 여행을 포기했다.

디지털 혁명은 아날로그 방식의 신문산업을 잠식하고 있었다. 직장생활이 끝을 향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민와 아이들을 키운 교외 집을 팔고 전쟁터 같은 LA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내 그리고 15년을 동고동락한 늙은 골든 리트리버 레이시와 셋이서 떠나는 여행을 계획했다.

아파트에 산 지 1년 후 퇴사가 결정되고 직장생활을 마무리하는 동안 스프린터 밴을 개조한 B클래스 RV를 구입했다. B클래스 RV는 기동성은 있지만 생활하기는 불편했다. 단기간 휴가여행에 적합한 차였다.

RV를 세워놓고 두 달여를 준비하며 지냈다. 본격적인 출발 전 아내와 레이시를 태우고 하루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노환 중인 레이시가 여행 중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지 여행 다음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나는 후배들과 이별주를 하고 있었다. 아내 전화를 받고 집으로 달려갔다. 마루에 레이시가 깊은 잠에 빠진 듯 누워 있었고 슬픈 모습의 아내가 지켜 앉아 있었다.

80대 중반의 주얼 부부. 요트와 RV를 이용해 27년째 여행을 하고 있다.

레이시가 숨을 거두는 순간 창문이 부서질 듯 강풍이 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 달여 후 2016년 6월1일 길에 나섰다.

LA에서의 생활을 마감했다. 이십수년의 추억을 뒤로 하고 달렸다. LA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머릿속 추억도 가물가물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2년이 넘게 미국대륙 동서남북의 끝 샌디에이고 카브리요 국립기념지, 워싱턴주 니아 베이, 메인주 마다와스카, 플로리다 키 웨스트와 캐나다 동부와 서부, 알래스카까지 8만여 마일을 달렸다. 지구를 세바퀴 반 돈 셈이다.

특별히 어디를 가보고 싶고 무엇을 먹고 싶고 누구를 만나고 싶어서라기보다 익숙한 환경과 허무함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다. ‘인간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쾌락을 위해서다’라는 오스카 와일드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매일 달렸다. 2018년 4월 LA에서 두 달 머물며 차를 버스형 A클래스 RV로 바꾸고 북상했다.

RV버스는 10톤이 넘는 육중한 무게에 폭도 넓고, 길고, 차고도 높다. 집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편안하지만 밴을 개조한 RV보단 기동성도 떨어지고 제약도 많다.

차를 바꿈으로써 라이프 스타일이 바뀐 것이다. 질주를 하듯 다니기보단 여행길에 마주하는 사물과 현상을 관조하며 다니게 됐다.

오리건주 해안가 캠핑장에 들어서 5마일의 속도로 천천히 운전해 나가는데 한 분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한국말로 ‘아저씨’하고 부른다. 일면식 없는 백인 할머니가 한국인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먼저 건넸다. 손을 흔들어 가볍게 인사를 하고 캠핑 자리에 도착했다. 노인부부의 RV버스를 찾았다.

부부는 1988년 군생활을 한국에서 은퇴하고 미국으로 왔다.

놀랍게도 이들은 27년째 여행을 하는 80대 중반의 유니스와 프랭크 주얼 부부였다. 공군 제트기 조종사 프랭크와 간호사 출신 유니스 부부는 88년 군생활을 한국에서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은 한곳에 정착하기 보단 요트를 사서 동부 대서양을 위아래로 항해하며 살았다. 10년전 RV버스로 바꿔 여행을 계속하며 살고 있다.

이들 부부는 한국에서의 2년 반 생활이 인상 깊었던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많은 한국말, 음식, 한국의 명소와 친구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행 고수인 프랭크, 유니스 부부는 여러 가지 유익한 RV여행 정보를 전해 줬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워싱턴주로 떠났다.

많은 RV 여행객들이 시원한 서부해안을 따라 RV캠핑을 하며 지내다 겨울이면 따듯한 캘리포니아로 이동해 생활한다. 출발 전 차를 점검하고 승용차를 RV뒤에 붙이고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수많은 ‘우연한 만남’ 이 있다. 우연한 만남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들 부부를 통해 내 삶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여행을 하는 이유는 여행지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여행지에서 만나는 것들과 함께 나를 찾아가는 것이라는 여행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글, 사진 / 신현식

23년간 미주중앙일보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진부장과 사진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93년 도미 전까지 한국에서 광고사진 스튜디오 ‘옥슨’ 설립, 진도그룹 사진실장, 여성지 ‘행복이 가득한 집’과 ‘마리끌레르’ 의 사진 책임자로 일했으며 진도패션 광고 사진으로 중앙광고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 성소수자 사진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6년 6월 RV카로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으며 2년 10개월 동안 40여개 주를 방문했다. 여행기 ‘신현식 기자의 대륙탐방’을 미주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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