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90년대 인기 밴드 멤버의 얼굴이 커다랗게 그려진 티셔츠. 조금 촌스러워 보이는 디자인은 그렇다 쳐도 너무 낡아 곳곳에 구멍이 나고 얼룩도 보인다. 언뜻 보기에는 ‘줘도 안 입을 옷’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티셔츠의 가격표에는 ‘$400’이라는 숫자가 붙어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옷들이 매장에 걸리기가 무섭게 팔린다는 것.
LA한인타운 인근 멜로즈 길에 있는 빈티지 의류 전문점 ‘라운드 투(Round Two)’는 요즘 호황을 누리고 있다.
◇빈티지 열풍
10대와 20대들이 부모 세대의 옷을 찾고 있다. 색이 바래고 땀내라도 날 것 같은 옷도 그대로 입고 다닌다. 과거의 유행을 재해석한 복고풍과는 분명 다른 트렌드다.
‘라운드 투’의 오너인 크리스 러소는 “90년대 유행하던 티셔츠나 재킷 등에 10대와 20대들이 열광하고 있다”며 “심지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오는 고객들도 있다”고 전했다. 빈티지 의류의 인기가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얘기다. 빈티지 의류판매협회(NARTS)라는 단체의 추산에 따르면 연간 시장 규모가 40억 달러에 달한다.
다양한 빈티지 의류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것은 9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시기는 다양한 음악 장르가 공존한 시기. 로큰롤 전성기에 힙합도 싹을 띄우기 시작했다. 이런 음악적 자유분방함이 패션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라운드 투’에서 만났던 크리스 데이비스라는 14세 소년도 90년대 패션의 광팬이다. 빈티지 티셔츠를 구입하기 위해 샌디에이고에서 일부러 LA까지 왔다는 그는 “내 나이보다 오래된 셔츠만 입고 싶다. 90년대 패션이 아니라면 아예 입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장원효(33·의류 디자이너)씨는 “빈티지는 이전 유행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빈티지 옷을 입으면 정말 ‘진짜’라는 생각이 들고 그 시대를 입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빈티지 트렌드를 설명했다.
◇로우 라이프
90년대 패션 아이템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가 ‘토미 힐피거’와 ’폴로’ 다. 90년대 뉴욕에서 동네를 주름잡던 갱스터와 래퍼들이 즐겨 입고다녔던 브랜드들이다. 그들은 상품에 붙은 태그를 일부러 떼지 않고 착용했다. ‘훔쳐서 입고다닌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이른바 ‘로우 라이프’ 스타일이 됐다. 요즘 빈티지 의류에 관심을 갖는 젊은층도 이 로우 라이프 스타일에 열광하고 있다.
빈티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빈티지 의류의 가격도 오르고 있다. ‘라운드 투’ 업주인 크리스 러소에게 가장 비싼 옷이 어떤 것이냐고 묻자 ‘폴로 재킷’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직접 보여준 폴로 재킷은 우주복과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현재 경매 사이트에 등록이 되어 있는데 최소 가격이 1만4000달러라고 한다. 90년대 인기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가 영화에 출연하면서 입고 나온 적이 있어 더 인기가 높단다.
이 업소의 구매담당 매니저인 저스틴 에스포지토는 “(폴로 재킷은)빈티지 의류에 대한 관심이 적을 때 경매 사이트에서 100달러에 구입했던 것”이라며 “이후 빈티지 열풍이 불면서 가격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고 설명했다.
◇열광의 이유
왜 낡은 옷에 열광하는 젊은층이 늘어나는 걸까? 전문가들이나 빈티지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셜미디어의 영향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유명인들의 패션 스타일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행에 민감한 젊은층에 빠르고 광범위 하게 전파된다는 것. 새크라멘토에서 빈티지 의류를 구입하기 위해서 LA에 왔다는 브라이언 러브(24)는 “래퍼인 칸예 웨스트나 디자이너 제리 로렌조와 같은 사람들이 빈티지 패션을 입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며 “최근에는 많은 유명인들이 자신의 빈티지 패션을 소셜 미디어를 통해 뽐내고 있다”고 말했다.
LA에서 빈티지 의류점 ‘커런트 어페어’를 운영중인 리처드 웨인라이트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소비자들이 ‘새 옷’에 쉽게 싫증을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패션쇼에서 새롭게 발표되는 옷이라도 이미 6개월 전부터 언론에 소개된다. 런웨이에서 옷이 소개될 때쯤이면 이미 소비자들은 질린 상태다. 하지만 빈티지 옷은 다르다. 유행을 덜 타고 쉽게 질리지 않는 면이 있다”고 말했다. 빠른 유행 변화와 비슷한 디자인의 제품이 생산, 유통되는 이른바 ‘패스트 패션’에 대한 반작용으로 빈티지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제리 로렌조를 보고 빈티지 옷을 구매하기 시작한 앨버트 김(24·학생)씨도 이런 진단에 동의했다. 빈티지가 나만의 개성을 살리는 데 제격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층이 많다는 것이다. 김씨는 “빈티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희소성이다. 대량생산 되는 옷들에 질렸고 구하기 힘든 빈티지 옷을 찾아서 입으면 뿌듯함과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어디에도 없는 자신만의 패션을 찾아 빈티지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빈티지의 미래
일시적 현상은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빈티지가 현재 패션계의 가장 큰 화두로 등장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열광하니 패션업계 또한 영향을 받고 있다. 명품 의류 브랜드들 조차 빈티지와 같이 낡은 느낌을 준 의류들을 출시하고 있을 정도다. 장씨는 “옷을 디자인 할 때 과거 유행했던 옷들을 많이 참고한다. 마치 역사책을 보듯이 공부하다 보면 최근 빈티지 트렌드에 맞는 디자인이 나올 때가 많다”고 말했다.
라운드 투의 크리스 러소는 빈티지의 미래에 대해 묻자 “아무도 트렌드를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빈티지의 유행은 꽤나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빈티지 유행이 시작된 것이 30년 전이다. 금방 사라질 트렌드는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빈티지 옷들은 더 귀해지고 희소성도 높아질 것이다. 빈티지를 찾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것으로 생각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90년대 랩스타 투팍의 셔츠를 구입한 후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브라이언 러브는 “(투팍의) 음악, 패션, 영화 모든 것을 사랑한다. 나는 1990년대를 지금 2010년대에 되돌리고 싶다”
빈티지란?
빈티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와인이다. 와인에서의 빈티지는 생산년도를 의미하며 빈티지 와인은 ‘풍작의 해에 양조한 포도주’를 뜻한다. 패션업계에서의 빈티지 또한 와인 용어에서 유래가 됐다. 즉, 오래됐지만 가치고 있고 새로운 느낌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역시 오래되긴 했지만 보편적이며 고풍스러운 멋을 뜻하는 클래식과는 다르다.
취재, 글/ 조원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