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 박스 오피스 1위 애니메이션 ‘도리를 찾아서’ 앤드류 스탠튼 감독 인터뷰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2003년 작 ‘니모를 찾아서‘에서 주인공 부자인 말린·니모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던 도리가, 이번엔 주인공이 돼 돌아왔다. 무려 13년 만이다. 단기기억상실증에 시달리는 도리는 벌써 모든 것을 잊었을지 모르나, 관객들은 늘 그녀를 그리워하고 궁금해 했다. 그 마음을 알기라도 했다는 듯, 픽사는 지난달 개봉한 ‘도리를 찾아서‘를 통해 관객들과 함께 도리의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한 모험에 나섰다.
전작을 쓰고 연출했던 앤드류 스탠튼 감독이 그대로 돌아왔고, 픽사의 핵심 인력 250여 명이 4년에 걸쳐 밤낮으로 노력한 끝에 또 하나의 역작을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관객들도 뜨겁게 응답했다. 개봉 첫주 애니메이션 영화로는 역대 최고 오프닝 스코어인 1억3500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고, 독립기념일 연휴인 지난 주말까지 내리 3주를 박스오피스 정상에 우뚝 서며 눈 깜짝할 사이 3억805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대체 그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만났던 앤드류 스탠튼 감독에게 직접 들어봤다.
앤드류 스탠튼 감독은 픽사의 초창기 멤버 중 하나다. 그를 포함한 전 직원이 고작 9명이었던 1990년 애니메이터로 픽사에 합류한 스탠튼 감독은, 이후 아티스트보다는 작가로서 더 빛나는 활약을 해 왔다. ‘토이스토리‘ 시리즈, ‘몬스터 주식회사‘ ‘월-E’ 등의 명작이 모두 그의 머리에서 탄생한 이야기다. ‘니모를 찾아서‘를 쓰고 연출한 것도 바로 그다. 무려 13년 만에 자신이 창조했던 바닷 속 세계로 다시 한번 관객들을 안내할 준비를 마친 스탠튼 감독은 차분하지만 자신있게 ‘도리를 찾아서‘를 소개했다. 오랜 준비 기간에 대한 확신이 그의 설명에서 저절로 묻어났다.
Q. 속편이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원래 영화를 만들고 나면 한동안 완성작을 보지 않는다. ‘니모를 찾아서‘도 6~7년 동안 단 한 번도 안 봤다. 그러다 3D 버전 재개봉을 준비하며 완성작을 처음으로 보게 됐는데 그때부터 도리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젠 니모와 말린이라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지만, 바다 저편 어딘가엔 매일같이 도리를 그리워하고 있을 누군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도리에겐 잊고 있던 과거를 스스로 다시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리란 확신도 생겼다. 그때부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혼자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 꺼내면 모두가 ‘당장 하자!’고 할까봐 두려웠다.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스토리가 완성됐을 때, ‘니모를 찾아서‘를 함께 썼던 밥 피터슨, ‘윌-E’ ‘존 카터‘ 를 함께 만든 프로듀서 린지 콜린스, 오랜 동료인 앵거스 맥클레인 등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2011년의 일이다. 그때부터도 완성까지 5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Q. 스토리 면에서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억지로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당연히 나왔어야 할 필연적 이야기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니모를 찾아서‘와도 자연스럽게 짝을 이루길 바랐다. ‘토이스토리‘ 2편이나 3편처럼 말이다. 도리가 주인공인 만큼, 스토리 안에 여성의 목소리와 시선을 담아 내고도 싶었다. 여성 작가(빅토리아 스트라우스), 여성 프로듀서와 함께 하다 보니 그 부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듯하다.”
Q. 특별히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게 이렇게 어려울지 몰랐다. 어린 시절의 배경이나 그 간의 경험을 끌어와 캐릭터를 세공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고, 회상이나 자기 성찰이 안 되니 감정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도 아예 불가능했다. 때문에 주변 캐릭터들을 통해 이야기와 감정을 끌어가는 데 각별히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Q. ‘니모를 찾아서‘를 만들 때 도리 캐릭터가 이처럼 인기를 끌리라 예상했었나
“단순한 조연 캐릭터가 이 정도로 사랑받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나에겐 늘 각별했던 캐릭터다. 사실 ‘니모를 찾아서‘ 속 말린은 꼭 그맘때의 내 모습이었다. 처음 아빠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일에 노심초사하고 아이를 과보호하려 했던 당시 내 모습이 말린 캐릭터에 그대로 들어가 있었다. 반면 그때 그때 닥친 순간에만 충실한 도리 캐릭터는 항상 내가 꿈꿔왔던 모습이었다. 도리 캐릭터를 만들고 연출하는 것만으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많은 것을 치유받는 듯 했다. 관객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Q. 도리가 딱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이 눈에 띄었다
“사실 도리는 퍽 비극적 캐릭터다. 그 누구와도 오래 연을 맺을 수가 없는 캐릭터 아닌가. 모두가 짜증을 내며 그녀를 떠나던지, 아니면 그녀가 그들을 잊어 버리게 되던지 둘 중 하나였다. 직접적으로 표현된 적은 없지만, 그 망망대해에서 얼마나 외로웠겠나. 도리는 기억 못하지만, 바다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딸을 기다리고 있을 그녀의 부모를 꼭 찾아주고 싶었다.”
Q. 작품 구상에 참고했던 디즈니 영화가 있다면
“‘밤비‘는 내 인생 최고의 애니메이션이자 모든 작품의 모델이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그대로 담아 내면서, 동물 하나하나의 특성을 살려 의인화한 솜씨를 동경해 왔다. 이번 영화에서도 ‘밤비‘의 분위기를 내려 했다. 바다는 춥고 어둡고 무서운 곳인데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동시에 아주 아름답고 흥미진진한 곳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캐릭터도 가능한 한 유쾌하고 재미있게, 하지만 생물학적인 특성은 최대한 살려 현실감을 주려고 노력했다. 도리만 봐도 그렇다. 물고기의 기억력이 5초란 ‘사실‘에 근거해 만든 캐릭터다. (웃음)”
Q. (픽사의 크리에이티브 총괄인)존 래스터는 어떤 방식으로 창작에 도움을 줬나
“존 래스터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가 아주 객관적인 시선으로 작품을 보고 조언을 해준다는 점이다. 우리처럼 몇 년을 한 작품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절대 찾아 낼 수 없는 잘못된 점이나, 아무도 꼭 집어내지 못했던 부족함 점들을 귀신같이 지적해준다. ‘좋은‘ 작품을 ‘훌륭한‘ 작품으로 한 단계 발전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 나와는 각별히 잘 맞는 구석이 있다. 나는 늘 ‘이걸 뺄까, 저걸 뺄까‘ 고민하는 스타일이라면, 래스터는 늘 ‘하나만 더, 한 번만 더‘ 를 외치는 스타일이다.”
Q. ‘마린 라이프 인스티튜트‘라는 대형 수족관을 배경으로 택한게 특이하다
“평소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는 존 래스터는 ‘니모를 찾아서‘때부터 해중림(kelp forest)을 배경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강추를 했었지만, 직접 가 볼 방법이 없어 포기했다. 너무 무섭고 위험하더라. (웃음) 새롭고 재미난 배경을 궁리하던 차, 우리가 자료 조사를 위해 늘 드나들던 대형 아쿠아리움이 떠올랐다. 너무 친근한 공간이라 ‘반칙‘ 같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대형 아쿠아리움만큼 다양한 해양생물이 모여 살고 구석구석 흥미롭게 꾸며놓은 곳도 없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도리가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점이다! 1편에서 도리가 글자를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은 이야기 진행에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아무도 그 배경에 대해선 알 수가 없었다. 도리가 기억을 못하니까! 그 점에 착안해, 어쩌면 도리는 인간과 가까운 환경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면에서 ‘마린 라이프 인스티튜트‘는 최고의 배경이었다.”
Q. 13년 만에 도리 역을 다시 해달라고 했을 때 엘렌 드제네러스의 반응은 어땠나
“엘렌은 ‘니모를 찾아서‘ 후 늘 속편을 만들어야 한다고 나에게 졸랐었는데, 그때마다 난 그냥 농담으로 넘겼었다. ‘도리를 찾아서‘의 제작이 확정됐던 2012년 여름 무렵 전화를 걸어 속편을 만들게 됐다고 하자 아주 좋아하더라. 엘렌이 토크쇼를 통해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니모를 찾아서‘ 직후였다. 그사이 수퍼스타가 된 엘렌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궁금했는데, 그대로였다. 첫 녹음을 하러 온 날 매니저도 없이 혼자 나타났다. 2003년 더빙 때와 똑같은 녹음실에서 똑같은 엔지니어와 작업을 했는데, 우리 둘 다 주름만 조금 늘었을 뿐 모든 게 그대로였다.”
Q. 엘렌은 워낙 애드립이 뛰어난 코미디언으로 알려져 있는데
“‘니모를 찾아서‘때부터 엘렌이 원하는 즉흥연기는 언제건 마음껏 할 수 있게 자유를 줬다. 그가 얼마나 재미있고 명석한 코미디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미디언들이 모두 즉흥연기를 좋아할 거라는 것은 큰 편견이다. 엘렌만 해도 철저한 계획과 연습을 아주 중시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미리 써놓은 각본과 대사를 늘 최우선으로 했다. 좋은 의견은 언제든 자유롭게 주고받되, 서로의 영역은 철저히 존중하며 일했다.”
Q. 영화를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
“억지로 주제를 넣고 싶진 않았다. 다만 도리가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늘 ‘익스큐즈 미‘와 ‘아임 쏘리‘를 입에 달고 살던 도리가 조금은 더 당당하고 편안해졌으면 싶었달까. 그런 면에서 굳이 주제를 찾는다면, ‘자신의 별난 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정도가 되겠다. 모두가 흠이라고 손가락질하던 것들이 어쩌면 그 사람의 진정한 수퍼파워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
글 / 이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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