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회 아카데미 어워드는 문라이트의 작품상 수상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상을 아쉽게 놓친 영화들도 저마다의 매력을 가지고 빛을 내고 있다. 라라랜드를 비롯해 작품상 후보에 오른 9개 모든 영화들의 작품성은 그 어느 해에 비해도 뒤지지 않는다.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들의 리뷰를 통해서 2016년의 영화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영화 문라이트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소수 안에서 소외
2016년 미국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이었다. 특히나 흑인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은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각종 차별적인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인종에 관한 이슈는 더 크게 번져갔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한다면 문라이트가 2016년에 개봉해서 2017년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탄 것은 ‘이보다 더 시기적절 할 수 없는’ 일이다.
문라이트의 주인공 샤이론은 키가 작고 깡마른 아이다. 마이애미의 빈민가인 리버티 시티에서 살고 있다. 심약하고 수줍음이 많은 그는 ‘리틀’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친구들에게 항상 괴롭힘을 받는다. 어렸을 때부터 ‘세 보여야 하는’ 남자아이들의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흑인이라는 소수인종 안에서 소외되는 모습이다.
샤이론은 어느 날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해서 도망 다니다가 후안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쿠바출신 마약상인 그는 샤이론을 자상하게 대해준다. 그리고 옆에는 친구 케빈이 있다. 어머니도 항상 샤이론을 보살펴 준다. 현실은 힘들지만 최악은 아니다. 그에게는 기댈 곳이 있다.
기댈 곳이 없는 삶
하지만 영화의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가면서 그의 힘든 상황이 그려진다. 고등학생이 된 샤이론은 학교에서 힘이 약하고 동성애자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터렐’이라는 건달에게 지독하게 괴롭힘을 당한다. 아버지와 같던 후안은 죽었다. 어머니는 완전히 마약에 빠져서 아들을 구타하고 돈을 빼앗는다. 그가 기댈 곳은 유일한 친구 케빈뿐이다.
케빈과 샤이론은 우연히 바닷가에서 만나게 되고 둘은 대마초를 나눠 피다 키스를 한다. 애틋하다. 하지만 애틋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학교에서 샤이론을 괴롭히던 건달들이 케빈에게 접근한다. 같이 놀고 싶다면 샤이론을 때려눕히라고 한다. 결국 샤이론은 케빈에게 맞고 난 뒤에 집단 폭행을 당한다. 기댈 곳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그는 절망에 빠져서 결국 의자로 터렐을 폭행하고 경찰에 잡혀간다.
바다로 돌아가는 길
이후 샤이론의 인생은 극적으로 바뀐다. 애틀랜타에서 마약상이 됐다. 허약하고 수줍은 모습은 없다. 근육질에 거친 모습이다.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그러던 중 그는 마이애미로 돌아갈 일이 생긴다. 어머니를 보러 그리고 10년 만에 연락이 온 친구 케빈을 보러.
애틀랜타에 살던 그가 불쑥 마이애미의 케빈에게 나타나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때 동네에서 마약을 팔고 부하들을 겁주던 모습은 간데없다. 소년 같은 눈빛이 다시 떠오른다. 케빈과 어렸을 때처럼 서로에게 기대고 나자 바다 앞에 서있는 샤이론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나온다.
문라이트는 매우 아름다운 영화다. 왕가위 감독의 영향을 깊게 받은 장면 하나 하나가 그림 같다. 간결하고 담담하면서도 예쁜 화면들이 계속된다. 영화의 메시지 또한 매우 간단하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있지만 결국은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케빈을 만나러 온 샤이론은 언뜻 후안처럼 보인다. 금 목걸이와 금속치아로 터프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케빈에게 “그날 바닷가 이후로 날 만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는 다시 소년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무리에 끼려고 항상 노력한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샤이론 삶의 세 장면은 모두 어떻게든 남들과 비슷해지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샤이론의 힘겨운 삶을 닮고 있다. 그리고 샤이론은 결국 성인이 되서 성공적으로 가면을 쓰지만 그것이 너무 불편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흑인이면서 동성애자기에 ‘소수 중의 소수’인 샤이론은 케빈이 “넌 대체 누구냐”고 묻자 “나는 나야”라고 대답한다. 언뜻 보면 할 말이 없어서 대충 대답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말은 영화의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다. 사람 본연의 모습은 변하지 않으며 아무리 가면을 써도 그 모습은 우리 안에 있다. 샤이론은 마이애미의 바다에서 그것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