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회 아카데미 어워드는 문라이트의 작품상 수상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상을 아쉽게 놓친 영화들도 저마다의 매력을 가지고 빛을 내고 있다. 라라랜드를 비롯해 작품상 후보에 오른 9개 모든 영화들의 작품성은 그 어느 해에 비해도 뒤지지 않는다.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들의 리뷰를 통해서 2016년의 영화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영화 히든 피겨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한 가수 퍼렐 윌리엄스가 부른 영화의 주제곡
교과서에 나왔어야 할 이야기
이 영화의 제작을 맡은 가수 퍼렐 윌리엄스는 영화 제작에 나선 이유에 대해서 “교과서에 실려야 할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밝혔다. 이 말은 정확히 이 영화 전체를 설명해준다.
흑인은 학교에 가기도 힘들고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써야 하는 시대에 살던 주인공 셋은 의지와 능력만으로 차별을 모두 이겨냈다. 정말 교과서에 나와야 할 역사적인 일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만큼 극적인 부분이 모자라다. 영화는 무리 없이 흘러간다. 주인공들은 자신이 맞서는 차별을 하나씩 격파해 나간다. 중간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갈등이 나타나는 방식이나 해결방법은 치밀 하기보다는 평이하다.
이야기와 연출의 한계
흑인 여성 최초로 NASA 엔지니어를 꿈꾸는 매리 잭슨은 필요한 수업을 듣기 위해서 흑백분리정책에 도전한다. 백인만 다니는 학교에서 수업듣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판사를 설득한 끝에 남자 백인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수업을 듣는다. 수학 천재 캐서린 존슨은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고 중요한 정보는 모두 지워진 자료를 받지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며 프로젝트에서 역할을 넓혀 간다.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관리자를 맡지 못한 도로시 본은 부하직원들을 교육해 계산원을 프로그래머로 성장시킨다. 장애물을 넘어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현실적이지만 너무 현실적이라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이야기의 한계기도 하고 연출의 부족함이기도 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모범적인 이야기’기 때문에 서스펜스나 액션이 들어갈 틈은 없다. 조직 내에서 권력싸움도 찾아보기 힘들다. 복잡하고 진중하게 묘사될 만한 내밀한 심리상태가 드러나지도 않는다.
세 명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피상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연출에서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구조가 비슷한 세 개의 이야기는 병렬적으로 펼쳐진다. 사회적 분위기와 차별 때문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여성들이 어떻게든 난관을 극복해 낸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세 명의 주인공이 겹치는 부분도 거의 없다. 출퇴근을 같이하는 정도다.
작품상 후보의 이유
그럼에도 이 영화가 작품상 후보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2016년 아카데미의 화두가 다양성이었다는 점이 히든 피겨스가 작품상 후보에 오른 주요한 이유다. 흑인 여성이 사회의 차별을 이겨내는 이야기보다 더 아카데미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영화는 쉽게 찾기 어렵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실화에서 나오는 힘이다. 실화기 때문에 극적인 이야기구조는 없지만 실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볼 때 보다는 본 후에 더 재미있는 영화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연한 차별을 극히 이성적으로 극복하는 모습은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그래서 여운은 깊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