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돈 내고 볼만해?
클린트 이스트드와 톰 행크스가 만났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세월호의 비극을 겪은 우리에겐,더욱 더 뭉클하고 가슴을 치게 만들 영화.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배우 톰 행크스의 만남. 쟁쟁한 명감독과 톱스타들이 즐비한 할리우드에서도, 이처럼 이름만으로 신뢰를 줄 수 있는 조합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 ‘설리:허드슨 강의 기적‘(이하 ‘설리‘)에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설리‘는 지난 2009년 1월 승무원을 포함한 155명의 인원을 태운 채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했던 US에어웨이 1549편이 이륙 직후 새 떼와의 충돌로 엔진 두 개를 모두 잃고도 곧장 허드슨강 수면 위로 비상 착륙해, 사건 발생 24분 만에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모두를 구출해 낸 기적과도 같은 사건을 다룬다.
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체슬리 설리 설렌버그 기장의 화려한 명성 뒤로, 그가 겪어야 했던 고뇌와 압박감도 영화엔 생생히 담겼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톰 행크스, 두 ‘거장‘을 지난 6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만났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 2009년 실제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나.
“9·11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았던 시기인데다 미국 경제도 좋지 않았을 때라, 뉴욕 사람들은 물론 모든 미국인들에게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란 생각을 했다. 게다가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뉴스를 통해 본 이미지도 아주 강렬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서 있던 모습에 완전히 매료됐던 기억이 난다.”
– 그 기억으로 연출을 맡게 된 건가.
“사실 어시스턴트에게 대본을 받아 놓고도 한참을 안 읽었다. 신문과 TV를 통해 여러 차례 접한 내용이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라 생각했고 딱히 새로울 것도 없을 거라 지레 짐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시스턴트가 계속해서 ‘허드슨강 이야기 읽으셨냐‘며 거듭 재촉을 했다.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나보다 싶어 그제야 읽어보는데, 그 즉시 사랑에 빠졌다. 왜 진작 이 대본을 안 읽었을까 후회할 정도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갈등‘이 담겨있더라.
155명의 목숨을 살린 영웅으로 알려졌던 설리도 NTSB(미 연방교통안전국)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허드슨강에 불시착한)자신의 결정이 옳다는 걸 증명해야 했던 시간을 겪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모든 게 아주 극적으로 다가오면서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이입할 수가 있었다. 바로 그 ‘드라마‘가 내가 찾던 것이었다. 내가 한 일은 꿈 시퀀스 몇 개를 집어넣어, 관객들이 만일의 경우 일어났을 비극과 설리가 느낄 감정 등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한 것뿐이다.”
– 설리 역에 톰 행크스를 캐스팅한 이유는.
“내가 설리 역을 제안한 건 오직 톰 행크스 뿐이었다. 다른 어떤 배우보다도 역할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의 실제 설리 나이와도 비슷하고, 멋진 존재감과 겸손함까지 갖추지 않았나. 굉장히 외향적인 듯하지만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면에서도 설리와 잘 어울렸다.”
– ‘아메리칸 스나이퍼‘나 ‘설리‘처럼 실존인물을 다룬 영화를 만들 때 각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최대한 진실되게 그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객들이 나와 함께 영화 속 여정을 따라오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당연히 자료 조사도 많이 한다. ‘설리‘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최근의 일을 영화화할 땐 더욱 그렇다.”
– 거의 대부분의 장면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는데.
“아이맥스 측에서 한 번 써보라며 갓 나온 최신형 카메라를 빌려줘서 테스트를 해봤는데 화질이 아주 선명하고 훌륭해, 이번 영화에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아이맥스 측이 여러 면에서 많이 협조해줬다.”
– 실제로 젊은 시절 비행기 불시착을 경험한 적이 있다던데.
“1951년 군인으로 복무하던 21살 시절 일이다. 군복만 입고 있으면, 군용기 빈자리 아무 데나 탑승할 수 있었던 시절이다. (북부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부대에서 시애틀로 가려고 군용기에 아주 작은 공간에 탔었는데, 날씨 탓에 이륙 직후 폭풍과 먹구름 속에서 헤매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근처에서 물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곧장 침몰하는 비행기에서 안전벨트를 풀고 빠져나와 2시간 가까이 수영해 육지로 올라왔고, 한참을 걸은 끝에야 겨우 인적이 있는 곳에 닿아 목숨을 건졌다. 어디로 걷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환청와 환시에 시달릴 만큼 힘들었고, 진짜 ‘이러다 죽는구나‘ 싶었던 기억이다. 그래도 이 영화를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됐던 경험이다.”
– 영화를 통해 우리 현실 속 ‘영웅‘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확실히 영웅의 개념이 내가 자라날 때와는 바뀐 것 같다. 내가 어릴 땐 오디 머피 같이 일반적 기준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이룬 사람만이 영웅이었다. 하지만 요즘 시대엔,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될 수 있고, 영웅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이 때문에 ‘영웅‘이란 개념이 다소 남용되는 느낌도 분명 있다. 설리처럼 자신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훌륭한 일을 해낸 경우는, 이와는 다른 영웅이라고 본다.”
– 극장가에는 온통 망토 차림에 초능력을 지닌 수퍼히어로들 뿐이다.
“나도 어릴 적엔 ‘배트맨‘이나 ‘수퍼맨‘의 초판을 보며 열광했고, 이런 내용이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 영화계엔 ‘블록버스터‘의 규모와 껍데기만 남았지, 좋은 캐릭터와 스토리, 다양한 감정을 담은 블록버스터는 없어져 버렸다. 이런 훌륭한 영화들의 시대는 이미 저문 게 아닐까 싶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도 쏟아져 나오는 싸구려 수퍼히어로물의 속편들이 아니라, 리얼리티가 담긴 진정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나면 좋을 텐데 싶어 안타깝다.”
– 현장을 늘 차분하고 조용히 이끌기로 유명하다. 모든 장면의 촬영을 단 한 번 만에 마친다고도 소문이 자자한데.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크게 나쁘지 않으면 한 번에 찍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은 맞다. ‘액션!’ 소리도 안 지르다. 왜 감독이 현장에서 고함을 치고, 종을 쳐대며, 조감독은 정신없이 뛰어 다녀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가끔은 현장에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야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감독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나에겐 내 방식이 있다. 배우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분위기가 좋다. 나도 연기를 했기 때문에, 한참을 준비한 감정 신이 ‘액션!’ 소리 한 번에 날아갈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난 그냥 조용히 손짓을 하거나, 카메라를 돌려놓고 ‘언제든 준비 되면 시작하라‘고 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 연기 활동을 계속할 계획은 있는지.
“요즘 시대에 나 같은 사람이 할 만한 역할이 있기나 한가. 훌륭한 시나리오도 별로 없고, 좋은 이야기를 쓰는 사람도 더 이상 많지 않다. 1970년대부터 연기와 연출을 병행했다. 그 때는 함께 일하고 싶은 감독이 없단 생각에 연출을 시작했는데, 돌아보면 좋은 터닝 포인트였다. 이제는 내가 같이 일하고 싶은 감독들은 다 세상을 떠나서 연기를 못 하고 있다. (웃음)”
– 그동안 숱한 영화에 출연하고, 또 그만큼 많은 영화를 만들어왔다. 아직도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흥분되나.
“언제나 그렇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매번 새로운 모험이다. 이야기와 캐릭터는 물론, 함께 하는 배우, 스태프, 사용하는 카메라, 영화에 담기는 사운드까지 모든 게 늘 다르다. 새 작품을 할 때마다 나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에 대해, 스토리텔링에 대해 또 다른 것들을 배운다. 마치 인생처럼.”
톰 행크스
– 잠시 활동을 멈추고 휴식을 계획하던 차에 설리 역을 맡게 됐다던데.
“당시 좀 지쳐 있던 터라, 좋은 시나리오를 많이 거절하고 한동안 아무것도 안 할 계획이었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에게 연락이 와서 일단 시나리오를 받았다. 그런데 17분 만에 시나리오를 다 읽고 나서, 머릿속에서 작품 생각이 떠나질 않더라. 다시 감독에게 연락해 촬영 일정을 물었더니, 허드슨강이 얼기 전에 서둘러 시작해야 한다기에 그 길로 출연을 승낙해버렸다.”
– 실제 설리 기장과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했나.
“설리 부부가 2009년 아카데미 시상식 파티에 초대돼 지인의 소개로 간단히 인사를 한 적은 있었다. 설리 역을 맡게 된 후 다시 그들 부부와 만나 4시간 정도 함께 시간을 보내며 처음부터 끝까지 대본을 같이 훑었다. 설리는 이미 대본을 구석구석 읽고, 여러가지 지적사항에 대해 꼼꼼히 체크를 해놓았더라. 매 비행 전마다 비행기 주변을 직접 돌면서 상태를 확인해 오던 습관처럼, 시나리오도 그런 식으로 체크를 했던 모양이다. 대본상에 잘못된 부분이나, 현실과 달랐던 부분 등을 일일이 짚어줬다.
예를 들면 이륙 후 일정 고도에 다다르기까지 기장과 부기장은 관제탑과의 무선이나 비행에 관한 대화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허드슨 강이 아름다운 날이군요(****한글 번역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It’s a beautiful day on the Hudson)’라는 대사는 엄연한 ‘불법‘이란 사실 등을 말해줬다. NTSB 조사를 받으며 설리가 느꼈던 스트레스나, 그의 아내가 홀로 떨어져 겪어야 했던 불안감 등도 보다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 설리 캐릭터를 묘사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웠던 점은.
“그가 가진 수십 년의 경력과 비행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담아내는 일이었다. 설리는 늘 비행에 관한 생각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사고 당시 딱히 별도의 상황판단을 할 필요조차 없이 곧장 몸에 밴 감각과 본능으로 허드슨강 비상 착륙을 결정하고 이를 해냈다고 한다. 이런 걸 영화로 옮겨 오는 것이야말로 큰 도전이었다. 또 하나, 그와 같은 백발을 만들어 내는 것도 ‘화학적으로‘ 아주 힘들었다. 내 두피도 아주 고통스러워했다.(웃음)”
– 그간 꽤 여러 차례 실존 인물을 연기했다.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건 정말 힘들다. 당사자들이 영화를 볼 게 아닌가. 그들을 실망시키거나 화나게 만들긴 진짜 싫다. 그래서 이런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나름의 철학이 있다. 내게 허락된 범위 안에서 최대한 진실만을 담아내자는 것이다. 누군가의 주장이나 해석은 최대한 배제한다.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일 수록 잘 짜인 대본과 훌륭한 감독의 조합이 필수다. 설리에게도 말했다. ‘좋건 싫건, 제가 당신 역을 맡게 됐어요. 영화로 만들려다 보니, 압축되거나 과장된 부분도 있을 수 있고, 당신이 하지 않은 말이 대사로 등장하기도 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장 진실되고 정직하게 당신을 연기하도록 노력할겁니다‘ 라고.”
– 보통 사람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역할도 자주 맡았는데.
“영화의 힘이란 게,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만일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 아닐까. 평범한 인간의 모습과 행동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들이 그래서 흥미로운 거다. 게다가 난 그다지 강렬하고 무서운 페르소나를 지닌 사람도 아니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인 사람이다. 배우로서는 한계일 수도 있다. 때문에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지 않은 일을 겪는 이야기에 끌리는 거다.”
– 하지만 요새 할리우드에선 그런 이야기들을 거의 볼 수 없다.
“맞다. 그래서 난 망했다. 90년대 전성기를 찍었고, 이제 내리막길뿐이다. 아마 곧 넷플릭스에서나 날 보게 될 거다. (웃음) 하지만 새롭고 좋은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든 사람들은 다시 관심을 갖고 극장으로 몰려들 거라 생각한다.”
– 워낙 세계적 스타다 보니, 갑작스런 유명세로 설리가 겪어야 했던 고통에 공감 가는 부분도 있었을 법 한데.
“나도, 설리도,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공적인 영역의 나와, 대중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사적인 영역의 내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잘 안다. 게다가 셀러브리티로 산다는 것과 배우로 산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다. 셀러브리티로 산다는 건, 많은 경험과 실수와 이를 통한 지혜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모든 경험이 다 연기의 자양분이 되는 거니, 가끔 겪게 되는 불편함이나 스트레스를 굳이 ‘극복해야 겠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도 촬영 현장에서만큼은 셀러브리티가 아닌 배우, ‘미스터 행크스‘가 아닌 ‘톰‘이 되고 싶다. 다행히 영화 촬영 현장은 모두가 프로페셔널이고, 모두가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하나의 목표로 함께 일하는 곳이라 나 역시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과 함께 일해 본 경험은 어땠나.
“배우 겸 감독인 사람과 일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 깊이 실감했다. 쓸데 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법도 없었고, 굳이 필요없는 내용을 설명하거나 내 해석을 듣느라 에너지를 쏟는 일도 없었다. 절대 ‘액션!’ ‘컷!’ 같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카메라를 돌려놓고 ‘액션!’ 대신 ‘자, 해 보세요‘, ‘컷!’ 대신 조용히 다가와 ‘그거면 되겠네요‘ 하는 식이었다. 가끔은 감독이 현장에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오히려 준비는 더 철저히 해 가게 되고, 연기도 할수록 더 잘하게 되더라. 나 뿐만이 아니라 현장의 모든 스태프들이 그랬다.
사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트우드 감독과 일해봤던 스태프들에게 ‘정말 모든 장면을 딱 한 번만 찍느냐‘고 물어봤다. 그들의 대답은 이랬다. ‘테이크는 많지 않지만, 카메라에 담기는 내용은 많을 거에요‘. 사실이 그랬다. 내가 원할 때, 특정 장면에 꼭 담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경우엔, 열 번이고 더 연기를 해 볼 수 있었다. 현장은 굉장히 빨리 돌아갔지만, 오히려 그 가속도로 인해 이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다른 측면들을 발견해 내는 경우도 많았다.”
–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비행기를 타지 말고, 자동차를 이용하자고 말하고 싶다. 하하“
글 / 이경민 기자
‘겅민양의 돈내고 볼만해?’ 는 영화&엔터 전문 이경민 기자가 목숨걸고 추천하는 금주의 핫 공연 &이벤트와 화제 인물을 다룹니다. lee.rachel@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