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돈 주고 볼만해?
‘레인맨’과 ‘뷰티풀 마인드’와 ‘본’ 시리즈와 ‘아저씨’의 만남이랄까?
흥미로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벤 애플렉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배대슈’ 속 안쓰럽기 그지없던 그의 모습이 조금은 잊혀질 정도.
사회성은 부족하지만, 숫자에만은 천재적으로 능한 자폐적 성향의 회계사. 겉으로는 조그만 사무실을 운영하는 듯 하지만, 실은 세계적 범죄 조직의 돈세탁을 도맡아 하는 이중적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 크리스. 10월 14일 개봉된 영화 ‘어카운턴트’는 이 흥미로운 캐릭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액션 스릴러다.
오랜 시간 지켜왔던 이중생활이 위기를 맞고, 마음을 나눴던 친구 다나마저 위험에 처하자, 감춰왔던 킬러 본색을 드러내는 크리스를 지켜보는 재미가 짜릿하기 이를 데 없다. 좀처럼 한두 마디로 규정해 표현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인물 크리스는 벤 애플렉의 묵직하고도 깊이 있는 연기를 통해 스크린 위에서 생생히 살아났다. ‘배트맨 대 슈퍼맨’으로 실망감이 컸던 팬들을 위로하듯, 다시 ‘믿고 보는 벤 애플렉’으로 돌아온 그를 지난 6월 웨스트할리우드에서 만났다. 이 자리엔 영화를 연출한 개빈 오코너 감독도 함께했다.
– 주인공 크리스는 자폐적이면서도 천재적인 인물이다. 캐릭터를 빚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듯하다.
벤 애플렉(이하 벤):실제로 오코너 감독과 자폐아들이 다니는 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을 관찰했다. 한두 사람의 특징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 보다는 여러 명에게서 다양한 특징을 빌려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현실 속 누군가를 따라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감독이 만들고자 했던 영화 속 캐릭터를 충실히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오코너 감독의 관점과 나의 해석이 서로 크게 엇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많은 의견을 나눴고, 감독이 편집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인물을 세공해나갈 수 있도록 연기를 할 때 여지를 많이 남겼다.
–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소외된 크리스의 심리와 감정도 훌륭히 표현해냈는데.
벤: 자폐아들을 만나보며 가장 놀라웠던 점은, 그들과 내가 다른 점 보단 비슷한 점이 훨씬 많다는 점이었다. 내가 만나본 자폐아들은 하나같이 친구를 사귀고 싶어했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영화에 기여하고 싶어했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공감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바람이란 걸 새삼 느꼈고, 어떤 이유에서건 그 관계 형성을 막고 있는 장애물이 있다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란 걸 깨달았다. 크리스도 마찬가지다. 크리스 역시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가 해야만 하는 많은 일들과 감춰야만 하는 비밀들 때문에 그러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 영화 속 크리스처럼 숫자에 능한 편인가. 그러고 보면 각본을 썼던 ‘굿 윌 헌팅’도 수학 천재에 관한 내용이었다.
벤: 전혀 아니다. 팁 계산도 잘 못한다. 4학년 된 딸 아이 산수 숙제도 못 봐 줄 정도다. 세금 보고도 모두 전문가에게 맡긴다. 이 영화를 찍는 내내 수학 천재가 된 듯한 환상에 빠진 것이야말로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어머니가 회계일을 하셨던 경험이 있어서 미리 대본을 읽어보시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셨다.
– 크리스 역에 벤 애플렉을 캐스팅한 이유가 있다면.
개빈 오코너(이하 개빈): 2011년에 처음 시나리오가 들어왔었는데, 제작이 진척되지 못하고 한차례 무산됐었다. 그러다 2014년에 똑같은 시나리오가 다시 들어왔고, 벤 애플렉이 캐스팅되면서 영화 제작에 속도가 붙어 완성까지 할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엔 벤을 캐스팅할 생각조차 못했다. 배트맨에 캐스팅됐단 소식에, 연출 예정작도 줄줄이 있단 얘길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벤의 에이전트가 전화를 걸어와 시나리오를 받아볼 수 있겠느냐고 묻더라.
평소 배우이자 감독으로서 벤의 활약을 존경했던 터라, 그가 이 작품에 불어넣을 풍부한 해석에 대해 기대가 컸다. 그 즉시 보낸 시나리오를 읽고 벤이 곧장 전화를 걸어왔고, 오랜 통화를 하면서 둘의 비전이 통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 영화엔 ‘레인맨’의 톰 크루즈 같은 캐릭터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좀 더 편안하게 영화에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인가 수화기를 붙들고 한참을 함께 고민을 했다. 아주 생산적인 통화였고, 그 길로 이 여정을 함께하기로 결정하게 됐다.
– 다른 배우들의 캐스팅 과정도 궁금하다.
개빈: 현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배우들과 일해 본 나쁜 기억이 있다. 아무리 배역과 잘 어울리고 재능이 있더라도, 부정적 에너지로 전염병을 퍼뜨리듯 촬영 현장을 망치는 배우들과는 절대 일하면 안 된다는 게 내 철칙이다. 그래서 늘 같이 일하고픈 배우들을 직접 만나 함께 있을 때 서로 편안한지, 영화와 기운이 맞는지,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을 준비가 됐는지 등을 확인한다. 애나 켄드릭이나 J.K 시몬스 두 사람도 그렇게 캐스팅했다. 주연 배우 셋이 끊임없이 나와 대화하며, 함께 좋은 영화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촬영장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 배우 뿐 아니라 감독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번에 함께 일해 본 개빈 오코너 감독의 장점을 평가해본다면.
벤: 아주 강한 리더이면서도, 배우들이 편안하고 자유롭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아주 날카로운 감각과 확실한 취향을 갖고 있지만, 배우가 제시하는 의견이나 아이디어도 존중해주고, 실수를 해도 금방 털고 다시 한번 연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감독과 배우 관계가 아니라, 모두가 ‘콜라보레이터’라 느끼게 해줬다.
– 조용하고도 빠른 액션 스타일이 굉장히 독특하다.
개빈: 모두 캐릭터에서 나온 액션 스타일이다. 오래 함께 일했던 스턴트팀을 집으로 불러 액션 장면 하나하나를 분석해가며 크리스 캐릭터에 걸맞은 액션을 짰다. 가장 중요한 점은, 액션을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짜는 것이었다. 크리스는 사람을 죽일 때도 모든 걸 머리로 먼저 계산해 절대 넘치는 법 없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세밀한 동작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무술인 쁜짝 실랏(Pencak Silat)에서 많이 응용했다. 벤이 총을 다루는 데는 상당히 익숙해 굉장히 큰 도움이 됐다.
벤: 이전에도 여러 영화를 찍으며 액션 트레이닝을 받았지만, 이번엔 마치 춤 안무를 외우듯 세밀하고 자세하게 액션 합을 외우고 연습했다. 복면을 쓴 액션 히어로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직접 소화해야 하는 장면도 예전에 비해 훨씬 많았다. 액션을 익히는 일이야말로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내게 가장 큰 도전이었다.
– 크리스 캐릭터가 진지한 순간에 예상치 못 한 웃음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벤: 촬영하면서도 아주 즐거웠던 부분이다. 영화 속 웃음이 만들어지는 순간이, 캐릭터와 설득력 있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우리 주변에도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유머, 자신만의 개그 코드를 가진 사람들이 꽤 있지 않나.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크리스에게 이런 측면이 존재한다는 건, 그를 더욱 매력적이고 친근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요소였다.
– 어떤 측면에서는 크리스에게서도 ‘배트맨’ 같은 슈퍼히어로의 면모가 읽히는데.
벤: 슈퍼히어로 장르가 가진 패러다임과는 명백히 그 방향을 달리하는 영화다. 하지만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즐겨 사용되는 설정을 공유하는 구석은 분명 존재한다. 남들과 다른, 가끔은 약점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능력을 통해 특별한 존재로 거듭난다는 설정이 그렇다. 우리 사회에선 아직도 ‘다름’이 ‘잘못’으로 평가받는다. 어린이들 사이에선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와 달리 이 영화는 ‘다름’이 ‘특별함’이 되는, 일종의 한계극복과 영웅탄생 스토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선 슈퍼히어로물과도 조금은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글 / 이경민 기자
‘겅민양의 돈내고 볼만해?’ 는 영화&엔터 전문 이경민 기자가 목숨걸고 추천하는 금주의 핫 공연 &이벤트와 화제 인물을 다룹니다. lee.rachel@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