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시처럼 그려내다
그래비티가 처음 나왔을 때 한 평론가는 ‘다른 영화가 소설이라면 그래비티는 시다’라는 평을 내렸다. 그래비티를 제대로 분석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평이다. 그래비티의 시작장면은 우주다. 우주에서 한가롭게 작업을 하면서 시작한다.
보통의 시나리오라면 주인공들이 훈련을 받으며 동고동락하는 모습을 그릴 것이다. 하지만 그래비티는 그렇지 않다. 거두절미하고 우주에서부터 시작한다. 감정선을 과감히 포기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흔히 우주하면 생각하는 화려한 액션도 찾아볼 수 없다. 스토리는 매우 간결하다.주인공이 불의의 사고로 우주에 미아로 남았지만 결국 난관을 극복하고 지구에 복귀하는 이야기다. 주제의식을 위해서 군더더기를 모두 버렸다. 그래서 언어를 가장 간결하게 그려내는 시에 비유된다.
덩케르크는 우주라는 무대가 전쟁터로 바뀌었을 뿐 형식은 그래비티와 비슷하다. 우리가 전쟁영화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요소들은 거의 없다. 주인공들의 애절한 과거사나 가족을 위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감정선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총을 쏘는 치열한 액션장면들 또한 없다. 전쟁터를 보여주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에서 적군인 독일의 군인들은 영화 말미에 5초 정도 나올 뿐이다.
서사구조 또한 매우 간단하다. 덩케르크 해변을 배를 타고 탈출하려는 병사와 자신의 요트를 몰고 가서 병사들을 구해오려는 민간인, 전투기를 타고 독일군과 싸우며 병사들을 지켜주려는 파일럿이 나오며 이야기는 특별할 것이 없다.
그래서 덩케르크는 시처럼 느껴진다. 물론 연출력에 있어서는 할리우드 최고임을 인정받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이기에 긴박한 느낌은 계속된다. 마치 자신이 전쟁터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다. 그래서 덩케르크는 보는 것은 관람보다는 체험에 가깝다.
놀란의 인장
하지만 간결한 이 작품에도 역시 놀란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데뷔작인 메멘토부터 시간이라는 주제에 천착해 온 감독이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독특한 진행을 보여준 메멘토로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고 인셉션과 인터스텔라를 통해서 ‘시간차’를 이용한 이야기를 선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놀란은 시간을 가지고 논다. 영화는 배를 타고 탈출하려는 병사들의 일주일, 군인들을 구하러 가는 요트의 하루, 그리고 전투기를 모는 파일럿의 한시간을 비슷한 분량으로 그려낸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그리면서 그의 연출력은 빛을 발한다. 화려한 교차편집으로 서로 다른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을 속도감 있게 잡아낸다. 세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 속 인물들이 만나기도 하고 얽히기도 하면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서로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세 개의 이야기는 노골적으로 인셉션의 요소를 빌려온 것이다. 인셉션에서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서로 다른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진행하던 것과 거의 비슷하다. 사실 이는 인터스텔라에서도 비슷하게 연출된 바 있다. 서로 다른 중력 때문에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행성들을 무대로 했다.
이러한 구성은 왜 젊은층이 놀란 감독에 열광할 수 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놀란 감독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은 게임을 많이 닮아 있다. 전통적으로 게임에서 많이 쓰이는 ‘스테이지’ 개념과 많이 닮아 있다. 흔히 ‘게임 한 판’이라고 불리는 게임의 스테이지처럼 영화가 진행된다. 게임의 문법에 익숙한 청년층들은 놀란의 이야기구조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빠르게 이해한다.
보통사람들의 전쟁
놀란은 간결하면서도 긴박감 넘치는 연출과 시간을 엇갈리게 만드는 이야기 구조를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보통사람들이 전쟁을 통해서 어떤 일을 겪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다른 전쟁영화들은 특별한 영웅들의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그려내지만 실상 전쟁이란 것은 생존하고 싶은 개인들의 이야기에 더 가깝다. 여기 나오는 군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적을 향해서 용감히 돌진하기 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빠르게 전장을 빠져나올까를 고민한다.
군인들을 구하러 요트를 끌고 가는 도슨 또한 대단한 야망보다는 아들과도 같이 느껴지는 병사들을 태우고 오고싶다는 생각이다. 영국 전투기 스핏파이어가 보여주는 공중전은 의도적으로 그 어떤 박진감도 배제된 채로 보여진다. 파일럿은 곡예비행을 통해서 전장을 지배하기 보다는 병사들을 살리려고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주변을 날다가 결국 자유활강으로 바다에 불시착해 적에게 포로로 잡힌다.
이 모든 것은 보통사람들이 전쟁에 어떻게 참여하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 개인의 생활 안에서 전쟁은 어떤 것인가를 체험할 수 있다. 화려하지 않고 지루하지만 결국은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감동적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