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들과 계곡, 빽빽하게 펼쳐진 세코이아 원시림을 볼 수 있다.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호수와 계곡, 높이가 2400여 피트나 되는 장엄한 요세미티 폭포, 전 세계 암벽 등반가들이 도전하는 하프돔, 마리포사 그로브가 그야말로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든다. 자연보호주의자이며 작가인 존 뮤어는 “요세미티는 내가 이제껏 보았던 수많은 자연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멋지다”라고 했다.

1833년 서부 개척자 조셉 워커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횡단하면서 요세미티를 최초로 탐험했다. 19세기 중반에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됐고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이 요세미티에 몰려와 이곳에서 몇 천 년째 살고 있던 이와이니치 인디언들과 충돌했다.

1851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시사의 명령을 받은 새비지 소령의 마리포사 민병대가 요세미티 인디언을 무참하게 살상했다. 1864년 링컨 대통령은 요세미티 계곡과 거대한 세코이아 숲으로 이루어진 마리포사 그로브 지역 일대를 캘리포니아 주립공원으로 지정했다. 요세미티에 사람이 몰리고 아고산대 목초지가 목동들에 의해 황폐화되자 존 뮤어가 미국 의회에 청원해 189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이후에도 존 뮤어는 시에라 클럽을 창설해 자연보호에 앞장섰다.

요세미티 빌리지에 있는 앤설 애덤스 갤러리의 전경.

요세미티는 전세계 사진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진에 관심없는 사람들도 거대한 산, 절벽, 폭포, 고목 등 서부의 웅장한 풍경을 담은 흑백사진이나 포스터를 봤을 것이다. 앤설 애덤스는 20세기 대표적 자연주의 사진작가이자 환경운동가다. 앤설 애덤스는 14살때 가족들과 함께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방문하고 요세미티의 웅장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해 사진을 시작했다.

1919년에는 피아노를 그만두고 시에라 클럽에 가입해 일했다. 1920년대를 시에라 네바다 지역에서 사진을 찍으며 보낸 앤설 애덤스는 1928년 시에라 클럽의 정식 사진사가 되었다. 1934년에는 회장을 맡아 37년간 요세미티에 살며 자연보호에 힘쓰고 사진을 찍었다.

19세기는 사진이 회화를 흉내 내는 회화적 사진 시대였다. 반면 화화는 사진의 사실적 재현성에 밀려 모네를 필두로 한 인상파 화가가 대두되면서 외적 사실주의에서 내적 사실주의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사진의 표현을 렌즈의 선명한 묘사력과 메커니즘에 근거한 사실주의를 제창했다. 사진의 아버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회화적 사진을 탈피하고 새로운 사진의 기틀을 만들었다.

앤설 애덤스 갤러리 안에 전시돼 있는 흑백사진들.

근대적인 초상사진과 패션사진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스티글리츠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사진계의 피카소라 불리는 에드워드 웨스턴은 스타이켄을 계승했다. 웨스턴은 선명한 포커스와 질감묘사로 사물을 강력하게 표현했다. 앤설 애덤스는 웨스턴의 사진에 영향을 받고 사실주의 사진을 찍었다.

앤설 애덤스의 작품은 흑백이지만 깊은 맛이 있어 예술성이 뛰어나다.

흑백 사진을 촬영할 때 중요한 이론인 존 시스템을 만들어 정교한 촬영과 인화를 했다. 애덤스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요세미티의 자연을 재창조했다. 요세미티 빌리지에 앤설 애덤스 겔러리가 있다. 요세미티의 아름다움을 정제해낸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원판을 이용해 인쇄한 작품을 구입할 수도 있다.

그의 작업을 계승한 제자들의 흑백 풍경사진 전시도 이뤄지고 있다. 자연을 숭배하고 사랑한 앤설 애덤스 사진을 보며 평온함에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글, 사진 / 신현식

23년간 미주중앙일보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진부장과 사진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93년 도미 전까지 한국에서 광고사진 스튜디오 ‘옥슨’ 설립, 진도그룹 사진실장, 여성지 ‘행복이 가득한 집’과 ‘마리끌레르’ 의 사진 책임자로 일했으며 진도패션 광고 사진으로 중앙광고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 성소수자 사진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6년 6월 RV카로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으며 2년 10개월 동안 40여개 주를 방문했다. 여행기 ‘신현식 기자의 대륙탐방’을 미주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