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유산 박물관 The Camera Heritage Museum

1 W Beverley St, Staunton, VA 24401

골프장 젖은 잔디에 미끄러졌다. 하얀 구름이 듬성듬성한 파란 하늘과 키 큰 나무의 끄트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카메라에 얽힌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미국 유일의 카메라 유산 박물관의 전경. 버지니아주의 작은 도시 스탠턴에 위치하고 있다.

80년대 초 추석을 앞둔 초가을이었다. 다음날 일찍 설악산 단풍사진 취재출장을 위해 핫셀블라드 카메라 풀세트와 니콘카메라 세트를 챙겨 퇴근했다. 당시 핫셀블라드 500CM 몸체와 광각, 망원, 표준렌즈 풀세트와 니콘 F2 세트 가격을 합치면 변두리 조그만 아파트 가격의 절반 정도였다.

퇴근길에 동료와 회사 앞 선술집에서 기분이 좋게 한잔 하고 집까지 가는 좌석 버스에 올랐다. 창가에 앉아 옆자리를 힐끗 봤다. 마르고 안색이 별로인 30대 중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하루의 피로와 술기운 때문인지 카메라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잠이 들었다.

누군가 깨우는 소리에 부스스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니 종점이었다. 집까지는 멀지 않아 택시를 탔다. 집에 들어와 방에 앉는 순간 무엇인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아뿔사! 카메라 가방을 기억해 내는 순간 머릿속은 하얗고 가슴은 무너졌다. 택시를 잡아타고 버스종점으로 가 수소문했다. 버스에는 가방이 없었다고 한다. 카메라 가방을 버스에 두고 내린 게 아니라 승객으로 가장한 도둑이 조는 틈을 타 훔쳐 달아난 것이었다. 방심한 나를 자책했다. 금전적인 손해도 그렇고 다른 장비를 수습해 출장을 가느라 곤혹을 치렀던 악몽이 떠올랐다.

97년 4월 다저스 박찬호 선발경기 때였다. 다저스 구장에는 시즌 초라 한국 언론사에서 특파된 여러 명의 사진기자 후배들이 있었고 지금은 AP통신사에 있는 LA한국일보 사진기자 후배도 있었다.

스포츠 경기는 보통 2대 이상의 카메라를 사용하는데 카메라 한대는 대구경 망원렌즈를 달고 또 다른 한대에는 70-200mm 줌렌즈를 쓴다. 그리고 24-70mm 줌렌즈와 플래시, 필름과 필기도구 등은 가방에 넣고 다닌다. 경기 시작을 기다리며 후배들과 사진기자석 뒤에 무거운 400mm 렌즈에 1.4 컨버터를 장착한 니콘 F5 카메라를 정렬해 놨다.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자리로 돌아와 보니 여러 대의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 중 내 F5카메라가 없어졌다. 400mm 렌즈에 1.4컨버터를 놔두고 카메라 몸체만 사라졌다.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고 컨버터를 렌즈에 놔둔 채 카메라 몸체만 가져갈 정도면 전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옆 흡연구역에 있을 때 황급하게 나가는 미국인 프리랜서를 봤다. 보안 카메라가 없었고 경기장 보안요원에게 신고를 하고 심증을 얘기해도 소용이 없었다.

정신이 들었다. 미끄러져 공중에 떠있다 떨어지는 순간 오른쪽 어깨에 있는 70-200 줌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깨지지 않게 몸안 쪽으로 당겨 감쌌다. 왼쪽 어깨 위에 있던 400mm를 장착한 카메라는 무게 때문에 부여잡을 수 없었다.

팔이 부러질 것 같았다. 몸이 땅에 닿는 순간 모노포드를 손에서 놨다. 카메라와 400mm 렌즈가 두동강 났다. 처참했지만 잠깐 그대로 누워 있었다. 하늘을 배경으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동료 기자, 경기를 관전하던 박세리 선수 어머니, 경기장 진행요원.

버지나아주 서부 중앙 셰난도어 국립공원 남서쪽 끝자락 평원에 자리 잡은 스탠턴이라는 인구 2만5000명의 작은 도시가 있다.

이곳에 미국 유일의 카메라 유산 박물관이 있다. 19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독특한 카메라를 전시하고 있다. 카메라와 함께 사용했던 작가들의 이야기도 함께 볼 수 있다. 스탠턴과 어거스타 카운티의 역사와 삶을 밝히는 사진 2000여 장을 전시하고 디지털화하고 있다. 비영리로 운영되는 카메라 유산 박물관은 200여 명의 기증자가 많은 수의 사연있는 카메라를 기증했다. 현재도 카메라 기증은 이어지고 있다.

재클린 케네디가 결혼하기 전 워싱턴 타임즈 사진기자 때 사용하던 카메라와 같은 모델인 그래플렉스 수퍼 그래픽 카메라.

롬멜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기종의 라이카, 재클린 캐네디가 사진기자시절 쓰던 카메라,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 당시 사용했던 항공사진용 카메라 등 사연이 담긴 카메라를 보면서 사진가들의 심정을 헤아려봤다. 사진가에게 카메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창조적 도구이며 물리적 사물에 내적 측면을 표현하는 눈의 연장이다.

스탠턴 시청의 모습. 서부 중앙 셰난도어 국립공원 남서쪽 끝자락 평원에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http://www.cameraheritagemuseum.com/

(540) 886-8535


글, 사진 / 신현식

23년간 미주중앙일보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진부장과 사진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93년 도미 전까지 한국에서 광고사진 스튜디오 ‘옥슨’ 설립, 진도그룹 사진실장, 여성지 ‘행복이 가득한 집’과 ‘마리끌레르’ 의 사진 책임자로 일했으며 진도패션 광고 사진으로 중앙광고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 성소수자 사진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6년 6월 RV카로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으며 2년 10개월 동안 40여개 주를 방문했다. 여행기 ‘신현식 기자의 대륙탐방’을 미주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