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잭슨빌이 시발점인 10번 프리웨이는 눅눅한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를 거쳐 텍사스에 이른다. 텍사스 휴스턴, 샌안토니오 등 대도시를 지나 지루하고 길게 서부를 향한다. 달리는 차창 밖에 보이는 거친 들판과 사막 풍경에 고단했던 이민생활이 떠오른다. 10번 프리웨이가 뉴멕시코주에 다다르기 전 텍사스의 마지막 도시 엘파소를 만난다.
멕시코 국경도시 시우다드 후아레스와 리오 그란데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도시다. 후아레스를 표시하는 산등성이 글씨가 엘파소 시내에서 훤히 보인다.
130만 명이 사는 북 멕시코 최대도시 후아레스는 마약범죄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라는 악명이 붙은 곳이다. 이곳을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보다 더 위험한 곳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반면 엘파소는 안전하다고 관광청은 홍보하고 있다. 범죄와 가난에 찌든 후아레스 사람들에게 엘파소는 천사의 도시다. 후아레스와 엘파소는 같은 하늘 아래 빛과 그림자, 절망과 희망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이 도시를 회유하다 최인호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깊고 푸른 밤’이 떠올랐다. 아메리칸 드림이 불러온 이민자의 처절한 삶 속에 녹여진 고독, 불신, 사기, 폭력, 복수, 사랑을 그린 멜로 영화다.
백호빈(안성기 분)은 미국에서 돈을 벌겠다는 야망을 품고 멕시코를 통해 밀입국한 젊은이다. 하루빨리 자리 잡아 본국의 임신한 애인을 불러들여 가정을 꾸미려 한다. 돈이 없던 백호빈은 유부녀를 갈취해 위장결혼 자금을 마련한다. 그는 영주권을 취득하기 위해 교포 여인 제인(장미희 분)과 위장결혼 한다.
주한미군 흑인병사와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해 살다 이혼한 제인은 위장결혼을 해주고 돈을 받아 생활하고 있었다. 제인은 개인적이고 삭막한 미국사회에서 외롭게 소외된 여인이다.그런 제인은 백호빈과 위장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사랑을 느끼며 삶의 희망을 발견한다. 백호빈이 우여곡절 끝에 영주권을 얻고 떠나려 할때 제인이 백호빈에게 사랑을 호소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진정한 사랑을 얻지 못한 제인은 결국 백호빈을 총으로 쏘고 자살한다. 영화는 깊고 푸른 밤처럼 우울하고 절망적으로 끝난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은 미국 4개 주와 멕시코 6개 주에 접해 있고 전체 길이는 1951마일이다. 20개 이상의 국경 검문소가 있고 엘파소에만 4개의 국경검문소와 통과 도로가 있다.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통과하는 곳으로 매년 3억 5000만명 이상이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매년 100만 명 이상의 불법 입국자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몰래 월경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내 불체자 수를 11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 중 멕시코 출신이 620만 명으로 절반에 가깝다. 이어 과테말라 72만3000명, 엘살바도르 46만5000명, 온두라스 33만7000명으로 중남미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로는 중국 출신이 26만8000명으로 가장 많으며 인도가 26만7000명으로 뒤를 잇고 있다. 한국 출신은 19만8000명으로 아시아 국가 중 세 번째로 많은 것으로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층을 상대로 밀입국자들이 불법과 폭력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문화적 불안감을 조성한 트럼프는 불법체류 이민자 단속과 추방, 멕시코 국경 장벽설치를 강화하고 있다.
20만 명 가까운 한인불체자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영화 속 이야기처럼 현재 진행형이다. 이들이 깊고 푸른 밤을 걷어내고 찬란한 희망의 빛을 맞았으면 하는 바람이다.국경도시 엘파소를 걸으며 단상에 젖어본다.
글, 사진 / 신현식
23년간 미주중앙일보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진부장과 사진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93년 도미 전까지 한국에서 광고사진 스튜디오 ‘옥슨’ 설립, 진도그룹 사진실장, 여성지 ‘행복이 가득한 집’과 ‘마리끌레르’ 의 사진 책임자로 일했으며 진도패션 광고 사진으로 중앙광고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 성소수자 사진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6년 6월 RV카로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으며 2년 10개월 동안 40여개 주를 방문했다. 여행기 ‘신현식 기자의 대륙탐방’을 미주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