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체즈 노예시장 Forks Road Monument
232 St Catherine St, Natchez, MS 39120
“우리는 우리를 도둑맞아 아프리카 대륙에서 끌려 왔다. 우리는 노예선 바닥에 누워 서로의 배설물과 오줌 위에서 함께 왔다. 목숨이 없는 몸둥이는 바다 밖으로 던져졌다. 오늘 우리는 믿음과 작은 기쁨으로 함께 서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흑인여류시인 마야 앤젤루 시의 일부분이다.
노예무역은 신세계가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세운 1500년대부터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하면서 서인도제도에 아프리카인 노예들을 데려 왔다. 영국인들은 1600년대 초부터 노예들을 이용해 담배, 쌀, 목화, 인디고를 재배했다.
영국 식민지 뉴잉글랜드 상인들은 삼각 노예무역을 했다. 상선에 럼주와 상품들을 싣고 서아프리카로 가서 노예와 교환했다. 노예상인들은 노예를 서인도 제도 대농장에 넘기고 설탕과 당밀을 받았다. 뉴잉글랜드로 돌아온 상인들은 설탕과 당밀을 럼주 생산업자들에게 팔았다.
뉴잉글랜드 영국인 노예 상인들은 삼각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았다. 1526년부터 1867년까지 약 125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실려왔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항해 도중 열악한 환경으로 많이 죽고 약 1100만 명만이 도착했다. 노예상인들은 아프리카 노예를 인격체로 보지 않았다. 물건을 적재하듯 무리하게 배에 싣고 항해했다.
노예선은 좁은 공간에 가장 많은 노예를 싣기 위해 특별히 고안됐다. 쇠사슬에 묶인 채로 배의 아래층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노예를 실었다. 대서양을 항해하는 노예선들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몇 달이 걸렸다. 지독한 환경 탓에 많은 수가 죽었다. 대부분의 노예운반선은 영국 배들이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은 인종차별주의의 원인이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며 노예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유럽인들의 인종차별 의식에 기반을 두고 노예들이 사회에서 동등한 지위를 얻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619년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의 성공적 정착으로 남부에 새로운 식민지 마을들이 생겼다.
1700년대에 백인정착지가 늘어나면서 노예 인구도 급속하게 늘어났다. 1750년 남부 식민지에는 약 20만 명의 노예들이 살고 있었는데 1800년대 초에는 70만명이 됐다. 전체인구의 30%가 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노예들의 수가 백인보다 많았다. 버지니아와 메릴랜드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예였다. 남부의 목화산업이 발전하면서 노예의 수는 더 늘어났다.
노예 수요가 증가하면서 노예를 재산으로 여기게 되었다. 노예가 비싼 값에 팔리면서 노예는 부의 척도이자 신분의 상징이 됐다. 1820년에서 1830년대 미국에서는 노예장사가 큰 돈벌이였다.대규모 노예매매 회사가 생기고 노예상인이나 노예매매 회사가 자체적으로 노예수용소를 운영했다.
볼티모어, 워싱턴 D.C,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같은 곳에 이런 노예 수용소가 있었다. 버지니아에서 노예를 사서 남부에 데려가 비싼 값에 파는 식이었다. 버지니아에서 400달러하는 노예가 뉴올리언스에서는 750달러였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오는 값의 2배가 넘었다. 백인들은 흑인 노예들장사로 부를 누리고 편안한 생활을 했지만 노역과 노예들의 삶은 비참했다.
1800년대 초 내륙 최대의 노예무역의 허브였던 미시시피주 나체즈를 방문했다. 한강철교 같은 나체즈 다리 건너 루니애나 주 비달리아가 영등포처럼 보이는 곳이다.
2월인데 비가 내렸다. 노예장사로 번영을 누렸던 나체즈 다운타운은 옛 영화가 온데간데 없고 퇴색한 건물들이 스산한 길을 지키고 있었다. 교외에는 국립공원국에서 관리하는 남부의 대농장이 있었다. 플랜테이션 농업의 규모를 보여주는 대농장에는 대저택과 비교되는 노예 오두막이 노예들의 고단했던 삶과 슬픔을 대변하고 있었다.
도시 중심가를 벗어나 동쪽으로 2마일 정도 가면 노예를 거래하던 노예 시장터가 있다. 나체즈는 1840년까지 전국의 노예상들이 노예 매매를 위해 모여드는 곳이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찰스턴 다음으로 큰 노예시장이었다. 노예시장은 주변 다른도시들에 노예를 공급하는 거점으로 유명했다. 450마일 나체즈 트레일을 따라 켄터키, 테네시까지 노예들이 사슬에 묶여 이동했다. 노예 시장터에는 노예를 결박했던 쇠고랑과 쇠사슬을 콘크리트에 고정해 전시하고 있었다.\
글, 사진 / 신현식
23년간 미주중앙일보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진부장과 사진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93년 도미 전까지 한국에서 광고사진 스튜디오 ‘옥슨’ 설립, 진도그룹 사진실장, 여성지 ‘행복이 가득한 집’과 ‘마리끌레르’ 의 사진 책임자로 일했으며 진도패션 광고 사진으로 중앙광고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 성소수자 사진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6년 6월 RV카로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으며 2년 10개월 동안 40여개 주를 방문했다. 여행기 ‘신현식 기자의 대륙탐방’을 미주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