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군대식 교복을 입고 머리를 민 채로 고등학교에 다녔다. 군사정권 시절에 아이러니하게 여자는 미니 스커트, 남자는 장발이 유행이었다. 공무원이시던 아버지의 눈을 피해 장발에 청바지 차림으로 종로와 명동의 밤거리를 헤맸던 기억이 선명하다.
기성세대가 보기엔 나는 퇴폐적 인간이었는지 모르겠다. 대학 1학년을 마친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종교적 의미와는 아무 상관없는 제도적 틀에 벗어나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들뜬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저녁 친구들과 종로 무교동에서 만날 약속으로 광화문에 도착했다. 인파에 묻혀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을 몇 걸음 내디딜 즈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다가와 나의 오른쪽에서 팔짱을 꼈다.
당황했지만 살짝 기대감이 들었다. 돌아보는 순간 기대감은 무너지고 일면식 없는 무표정에 나이를 분별할 수 없는 아저씨가 나를 낚아채고 있었다. 사복경찰이었다. 애원도 소용없이 지하도 가까운 광화문 파출소로 끌려 들어갔다. 유치장 안에는 비슷한 모습의 청년들이 들어차 있었고 한쪽 구석에선 이발사가 기계적으로 장발자들의 머리를 깎고 있었다.
결혼해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명절이나 휴일에 일을 해야하는 직업상 가족과 오붓하게 지낸 크리스마스의 기억은 없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의 환상에서 스스로 깨어났다. 아이들에게 꿈과 추억을 심어주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미국에 이민와 살면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외지에 나가사는 애들과 재회하는 날이었다. 미국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설날과 비슷해 독립해 나가 살다가도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이다.
반면 한국인들은 언제부터인지 젊은이들이 연인들과 흥청거리는 날이 되었다. 1887년 10월에 첫 교회가 설립된 후, 12월 25일에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재학당 학생들에 크리스마스를 전파했다. 이것이 한국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크리스마스가 상업성을 띠기 시작했다. 개화한 젊은이들이 성탄절에 여흥을 즐기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이때부터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연인들의 날로 자리매김했다.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은 성탄절을 휴일로 지정했고,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성탄절을 휴일로 법제화했다.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중후반부터 크리스마스는 젊은이들에게 ‘향락’의 날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카드에 그려진 하얀 눈과 산타클로스, 크리스마스 트리가 연상된다. 크리스마스 전날 여덟 마리의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자선을 베푸는 산타클로스가 동심을 불러 일으킨다.
2016년 여름 여행을 시작하면서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주와 캐나다 내륙을 통해 알래스카를 갔다. 수천 마일의 여정이었다. 10여일 운전해 사람이 드문 지역을 벗어나 알래스카 내륙으로 들어갔다.
페어뱅크스를 10여 마일 남겨두고 노스 폴이라는 인구 2000여 명의 작은 도시가 나왔다. 북극이 아닌 곳에 노스 폴(North Pole:북극)이라니 흥미로웠다.
노스 폴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은 1944년 부동산 개발개발업자가 노스 폴이라는 장난감 제조회사를 유치하기 위해 만든 지명이었다. 이곳에 크리스마스 장난감을 파는, 매일이 크리스마스인 산타클로스 하우스가 있었다.
노스 폴 지명에 산타클로스를 연관시킨 기가 막힌 상업적 아이디어로 성공한 것은 콘 밀러라는 사람이었다. 콘 밀러는 1952년대 이곳으로 이주해와 마을에서 상점을 운영하면서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고 가게일을 했다.
그러다 새로운 상점을 열면서 아예 산타클로스 하우스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크리스마스 장식품과 장난감, 그리고 야외용 산타 모형이 있는 대형 크리스마스 상점으로 성장했다. 특히 이곳에서는 가족에게 산타가 쓴 것처럼 산타클로스 하우스 소인이 찍힌 우편물을 보낼 수 있다. 1960년부터 똑같은 편지지를 사용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여름에도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직원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다. 신문 및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산타클로스 하우스는 성업 중이었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 산타에게 보내온 진심어린 편지들을 보면서 동심이 상업적으로 이용당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산타클로스 하우스는 멀리 알래스카 가짜 북극까지 찾아와 직원과 사진을 찍고 중국제 기념품을 사는 꿈을 이루고 꿈을 깨는 곳일지도 모른다.
글, 사진 / 신현식
23년간 미주중앙일보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진부장과 사진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93년 도미 전까지 한국에서 광고사진 스튜디오 ‘옥슨’ 설립, 진도그룹 사진실장, 여성지 ‘행복이 가득한 집’과 ‘마리끌레르’ 의 사진 책임자로 일했으며 진도패션 광고 사진으로 중앙광고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 성소수자 사진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6년 6월 RV카로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으며 2년 10개월 동안 40여개 주를 방문했다. 여행기 ‘신현식 기자의 대륙탐방’을 미주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다.